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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7 - 유쾌한 인공의 숲길(함양 상림)

by 장돌뱅이. 2012. 9. 18.

문명 앞으로 숲을 되돌리기
인류가 만들어 낸 문명이란 결국 파괴된 숲을 딛고 서있는 것이다.
개발과 진보란 뒤집어 말하면 자연과 숲에 대한 정복과 파괴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래서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는 말도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라틴어로 부패(corrumpere)라는 단어의 어원은 신작로와 같은 인위적인 길
(route)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길을 내기 위해 숲을 파괴하는 일차적인
행위도 그렇지만 그 길을 통해 전해지고 확장된 문명이란 것이 거기에 있던
숲이 만들어내는 향기와 감동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는 말도 되겠다.  

모든 자연이 그렇듯 숲은 우리에게 단순히 목재를 제공하는 창고의 수준을
넘어 존재한다. 갖가지 생명이 공존하는 터전으로서 숲은 단순한 물질의
집합체가 아닌 정신의 장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 어떠한 숲도 초라하지 않다’는 말에 나는 동감한다.
모든 숲은 싱싱하고 장엄하다. 숲 속에선 밝음도 도시의 밤거리처럼
천박하지 않고, 그늘진 어두움도 뒷골목처럼 음습하지 않다.  

국토를 떠돌다보면 종종 피폐한 문명 앞에 다시 숲을 되돌리려는
뜻있는 이들의 지혜로운 노력을 만나게 된다. ‘부패한’ 길은 숲을
밟으며 생겨났지만 그들은 그 길가에 나무를 심어
다시 숲을 만들었던 것이다. 인공이면서도 인공의 모습이 아닌 그곳에서
숲과 길은 비로소 ‘숲길’로서 평등하게 공존한다.
숲과 더불어 길도 살아나게 된 것이다. 

  
함양 상림 - 신선이 만든 숲

 경남 함양에 있는 상림(上林)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다.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조성하였다고 하니 무려 천년이 넘은 인공숲이다.
함양(당시 천령) 태수였던 최치원은 고을을 가로지르는 위천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었다.
이것이 퍼져 이루어진 숲이 상림으로 원래 대관림(大館林)으로 불렀다.

훗날 대홍수에 의해 둑의 중간이 파괴되자 그 틈으로 집이 들어서서
상, 하림으로 나뉘었다가 하림은 없어지고 상림만 남게 된 것이다.
숲을 조성하는 나무들은 모두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원래는 길이가 3KM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의 상림은 길이 1.6KM,
폭 80-200M만 남아있다.

숲이 조성된 시기가 천년이 넘었다고 하여 숲 속의 모든 나무가
천년이 된 고목은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운명을 따라 상림의
나무들도 성장하고 소멸하는 윤회를 거듭했다. 지금의 나무들은 거의가
100년 - 200년생이며 더러 500년 이상된 할아버지나무들도 있다.

상림에는 120여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연보다 더 자연스런 숲을
만들며 자라고 있다.  

   숲의 상층은 까치박달나무, 회화나무, 쉬나무, 고로쇠나무, 좁은단풍나무,
   신나무, 은백양, 고나무, 느티나무, 야광나무, 다름나무, 말채나무, 물푸레나무,
   이팝나무, 참오동, 물갬나무같은 덩치 큰 나무가 차지한다.
   중간층에는 개암나무, 백동백나무, 좀깻잎나무, 꾸지뽕나무, 산뽕나무, 고랑나무,
   국수나무, 복사나무, 윤노리나무, 콩배나무, 자귀나무, 초록싸리, ......, 쥐똥나무,
   작살나무, 누리장나무, 병꽃나무, 백당나무, 들꿩나무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그늘 아래에서는 키 작은 진달래, 멍석딸기, ......, 인동덩굴, 계요등,
   청가시덩굴, 박태기나무, 배롱나무, 탱자나무, 등이 한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김재일, 『생태기행』중에서-

이처럼 다양한 수종은 애초부터 심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세월에 걸쳐
자연적으로 들어와 뿌리내린 나무가 더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상림을 만든 최치원은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어머니가 상림에 갔다가 뱀을 보고 질겁하여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놀란 이야기를 했다.
그 길로 상림에 달려간 최치원은
“이제부터 상림 숲에 있는 일체의 뱀이나 해충은 없어지거라
그리고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말라”하고 크게 호통을 쳤다.
전설 때문인지 지금도 상림에는 지금도 벌레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다양한 나무들의 공존과 나무자손들의 무성한 번성으로 건강하던 상림은,
그러나 근래에 들어 주변 환경의 변화로 조금씩 그 건강함을 위협받고 있다.
최치원선생의 주문을 닮은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겠다.  

함양 상림은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는 20 여곳의 숲
가운데 유일한 활엽수림 천연기념물이다. 활엽수로 이루어진 숲이니
여름의 짙은 녹음과 가을의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겠으나
아내와 내가 그곳을 걸은 때는 지난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나무들은 잎을 떨군 채 헐벗은 자세로 겨울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나뭇잎을 벗어버린 청정하고 소탈한 숲의 모습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세한도 속의 나무처럼 꿋꿋해 보이는 숲에는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의 기상이 내려앉은 듯 했다.  

*2004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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