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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희망에 대하여

by 장돌뱅이. 2025. 6. 21.

"이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는 사기꾼이고, 절망을 이야기하는 자는 개자식"이라고 말한 사람은 옛 동독의 저항시인이자 가수 볼프 비어만(Karl Wolf Biermann)이다.
'이유있는' 절망과 '이유있는' 희망을 이야기하라는 뜻이겠다.

박순찬의 만화시사 <잘 봐 두어라>
6월 18일 한겨레 권범철 화백 만평

언제나 절망의 이유는 많고 희망의 근거는 작아 보인다.
성경에도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생명으로 가는 문은 좁다고 했던가.

근현대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루쉰(魯迅)은 사방이 막혀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 갇혀 죽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죽어가는 사람에게 작은 구멍을 뚫어 빛과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고민했다. 바늘만한 구멍으로는 현실적으로 벽을 부술 수도 없고 그저 안에 갇힌 사람에게 비참한 현실을 깨우쳐 줄 뿐이라면 무책임한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19세기말 20세기 초 나라 안팎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 중국의 상황을 반영한 루쉰의 고민과는 별도로 나는 희망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조지 프레더릭 와츠(George Frederic Watts) <희망>, 1886년

누군가에게 끌려와 어딘가에 갇혀있는 걸까?
눈이 가려진 맨발의 여인이 어둡고 황량한 공간 구석에 쓰러진 듯 기대고 있다.
바닥은 편평하지 않고 원형이다.
그 위에 올라 앉아 구부러진 자세가 불편해보이고 뭔가 여인의 상황이 위태로워 보인다.
나무틀을 손에 쥐고 있는데 실 하나만 희미하게 걸려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느다란 한 줄기 실 같은, 그게 희망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림의 제목도 <희망>이다.
솔직히 나는 어디에서도 희망을 읽기 힘들다.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럼
절망은

물빠진 뻘밭 위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감은 눈 앞에
환히 떠오르는 현실의 확실성으로 온다.
절망은 어둑한 방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서랍을 열어 서랍 속의 잡동사니를 뒤집어 털어내듯이
한없이 비운 머릿속으로
다시 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두 사람의 냉냉한 침묵과
옛날의 病에 대한 희미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와서
빈 머릿속에 불을 켠다.
실업의 아버지가 지키는 썰렁한 소매가게
빈약한 물건들을
건방지게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백열전구처
럼.

핏줄을 열어, 피를 쏟고
빈 핏줄에 도는 박하향처럼 환한
현기증으로,

환멸로,
굵은 저녁 밥냄새로,
뭉크 畵集의 움직임 없는 여자처럼

카프카의 K처럼

와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을
달래서, 살고 싶게 만드는
절망은,

-
장석주, 「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이 글 '완료'를 클릭하려는 순간, TV에서 미국의 이란 공습 속보가 나온다.
제길, 마음이 다시 사기꾼과 개자식 사이를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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