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이' 불상과 '거지탑'
운주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道岩面) 대초리(大草里) 천불산(千佛山)에
있다. 절이야 원래 심산유곡에 있는 것이라 해도 이 외진 골짜기에 남아 있는
‘천불천탑 (千佛千塔)’이란 대공사의 흔적은 경이롭고 신비롭다. 그 때문에
운주사를 찾는 모든 사람은 누가?, 언제?, 왜? 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바위를 지붕 삼거나 길옆 혹은 언덕 위 양지쪽에 삼삼오오 모여 서거나 앉아 있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노숙자’ 불상들은 하나같이 결코 세련되었다고 할 수 없는
외관을 하고 있다. 12미터에서 수십 센티미터의 다양한 크기에 작고 납작한 석편에
조각되어 평평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코만 기형적으로 도드라져 강조되어 있다.
팔다리의 형상도 비례가 제대로 맞지 않고 불분명하다.
옷 주름도 두서너 가닥의 선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운주사의 불상을 가리켜 ‘못난이’ 불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개의 불상은 불상으로서의 위엄이나 영험한 기력보다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해학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세파에 시달리고 일상에
찌들어 서글픔이나 서러움이 배인 보통사람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탑들도 그렇다. 어떤 통일된 양식이나 기준이 없이 3층, 5층,
7층, 9층 등 층수도 다양하고 모양도 사각형의 지붕과 몸돌을 가진 탑에서 둥근돌을
켜켜히 쌓아올린 원반형에서 심지어 다듬지 않은 돌덩어리를 그냥 쌓아 올린 것까지
있다. 탑의 몸통에 새겨진 마름모꼴이나 X나 V 같은 돋을새김이나 선새김의 기하학적
문양도 양식사(樣式史)에 유래가 없는 것이다. 불상처럼 탑들도 그 기기한 형상
때문에 ‘동냥탑’이나 ‘거지탑’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운주사는 의문투성이의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운주사는 그 어떤 경험도 참조되지 못한다” 는 강영조의 글은 그런 운주사를
잘 설명한다. 운주사의 신비함은 파격적인 불상과 탑의 양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절이 창건된 연대와 조성자 등 그 기원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데도 있다.
다만 중종 25년(1530년)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에 “천불산에 있는 운주사의
좌우 산능선에 1,000기의 불상과 석탑이 있다”는 기록이 전할 뿐이다. 1942년까지
석불 213기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불 70기와 석탑 12기만 남아 있다.
전설로 남은 시대의 정서
기록이 없는 곳에 전설은 풍성해진다. 실증적인 사실(史實)이 없으니 궁금증은
증폭되고 그에 따른 자유로운 상상이 축적된 이유일 것이다. 아내와 나는 국토를
여행하면서 그 지역에 관한 전설이나 야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어차피 우리의 국토여행이란 것이 휴식의 의미를 둔 가벼운 여행이니 역사적이거나
학문적인 건조한(?) 사실보다는 뭇사람들의 상상에 의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
지고 보태진 이야기들이 훨씬 편안하고 흥미롭게 다가오게 된다.
상상은 개인의 감수성이나 기호만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해있는 시대와 집단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아내와 나는 믿는다. 때문에 그런 ‘비공식적인’이야기들에는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현실적으로는 이룰 수 없는 바램이나 꿈 등이 더 짙게
스며 있는 법이고 그런 집단적 열망은 종종 그 시대의 진실에 맞닿아 있기도 하다.
운주사의 창건설화는 다양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어떤 경험과 사례도 참고가
되지 않는 운주사의 조형물들이 부추긴 결과일 것이다. 전설에 나오는 신선인
마고할미가 지었다는 설과 신라시대의 한 스님이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는
설이 있으며, 신분해방운동을 일으켰던 노비와 천민이 미륵의 도래를 갈구하며
탑과 불상을 세웠다고도 하고, 고려시대의 몽고침략기에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지었다고도 한다. 또한 비슷한 생김새의 돌부처의 모습을 근거로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만들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돌부처 조각의 엉성함에 비추어 석공들의
연습장이었다는 추론까지 있다.
그 중에 도선국사와 관련된 풍수비보설이 가장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으로 보았다. 그는 태백산과 금강산은
그 뱃머리이고 배의 꼬리는 월출산과 한라산이며 부안의 변산은 그 키이고
지리산은 삿대로 생각했다. 따라서 뱃구레에 해당되는 곳에 무게가 실려야 중심이
안정이 되므로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또는 우리 땅의 정기가 일본
으로 세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도 한다.
그러한 전설은 대개 논리적인 허구성을 가지고 있다. 도선국사의 경우는 9세기의
인물인데 비해 석탑과 석불이 12-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
이어서 연대가 맞지 않고, 노비와 천민들에 의한 만들어졌다는 설은 미륵사상이
조선 후기에 와서야 널리 퍼졌으며 또 천불천탑의 불사에 드는 막대한 경비를
생각해 볼 때 천민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설의 형태로 운주사에 덧칠해놓은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의 바램을 올바르게 읽어내어 오늘의 상황에 접목시키는 일일 것이다.
70년대에 황석영은 소설『장길산』속에 운주사에 관한 기존의 모든 설화를 모아서
새로운 설화를 만들어낸다. 박정희정권의 독재통치가 국민의 자유를 잔인하게 유린하는
상황 속에서 운주사 설화에 관한 그의 기지에 넘친 재생산은 실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의 부조리를 넘어 자유와 민주의 새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민중의
꿈과 의지를 소설 속에 정확하고 절실하게 드러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월출산을 근거로 하여 관군에 맞서 싸워오던 노비들은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산에서 포위된 채로 굶주리며 죽어 가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이 천불산
계곡으로 빠져 스며들었다. 그들은 손바닥만한 야산과 야산 사이의 황토에 밭을
일구어 보리와 조를 심고 숨어 살면서 때를 기다렸다. (...) 그들은 협곡 속에 살면서
미륵님의 계시를 들었다. 이 골짜기 안에 천불천탑(千佛千?)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것이었다.
도읍지가 바뀌는 새로운 세상, 그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 그들은 황토뿐인 야산에서 바위를 찾으려고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들판을 달리고 강을 건넜다. 바위를 굴려 오고 끌어오고 떠메고 오면서
그들은 북을 두드렸다. 집채만한 북을 골짜기 어구에 걸어 두고 산천이 떠나가라고
두드리면서 미륵상과 탑을 쪼아 세우는 노고를 온 세상에 알렸다. 세상의 모든
천민이여 모여라. 모여서 천불천탑을 세우자. (...) 늙은 노비가 일러서 계곡이 끝나는
곳에 새 절을 세웠으니 운주사(運舟寺)라 하였다.
젊은 노비가 물었다. 할아버지, 절 이름이 어째서 운주사요?
배를 부린다는 뜻이란다. 배가 물에 떠서 움직이게 된다는 뜻이니라.
젊은 노비는 더욱 궁금해졌다. 이 깊은 산골에서 배는 무엇이고 물은 또 무어요.
우리가 이제는 다시 죽지 못해 살던 섬으로 쫓겨 간다는 뜻이우?
(...) 그게 아니란다 얘야, 새로운 우리 세상이 바로 배가 되는 게야. 미륵님 세상이
배가 된다. 배는 물이 없으면 뜰 수가 없지 않느냐? (...) 물은 우리 같은 천 것들이고
만백성이란다. 우리 중생이 물이 되어 고이면 배가 떠서 나아가게 되는 게야.
(...) 미륵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본 적이 있어야지. 몸집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어찌 알고 미륵님을 감히 새긴단 말인고. 석수질 하던 사람
들은 거기에 생각이 닿자 모두 낙망하여 일손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늙은 노비가 다시 나서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보게 미륵님을 못보았다고? 이런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미륵님이란 자네 아닌
가. 자네 모양과 똑같은 이가 미륵님일세. (...) 일손을 놓았던 노비들은 다시 용기가
나서 이번에는 자기 모습대로 각기 미륵님의 모양을 만들어 나갔다. 골짜기 안에는
자기네처럼 성도 없고 이름도 없는 제멋대로 생긴 백성들이 꽉 들어차고 있었다.
(...) 그들은 캄캄한 밤이 되었어도 횃불을 밝히고 일을 계속하였다. 구백구십구의
미륵상과 탑을 세웠다. 마지막 미륵님을 만들자. (...) 미륵님의 형상이 이루어졌다.
자 이 미륵님만 일으켜 세워 드리면 세상이 바뀐다네. 그들은 머리와 어깨와 몸에
달라붙어 힘을 썼다. (...) 그때에 도저히 이 캄캄한 밤의 노고를 참지 못한 사람이
하나이 있어, 손을 떼고 혼자 떨어져 나가며 거짓말로 외쳐 버렸다. 닭이 울었다!
고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북채를 내던졌다. 미륵을 밀어 올리던 사람들도
힘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다. 미륵상은 비탈 저 밑에 처박혀서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 그 뒤부터 이상한 일이 있었으니 운주사의 대문을 여닫을 적마다 서울 장안
에서 우지끈대는 우뢰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서울이 옮겨지지 않은 것을 한하여
그런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래서 대문을 떼어서 영산강으로 떠나 보냈다.
운주사는 그 뒤로부터 운주사(雲住寺)가 되고 말았으며 이는 물이 차오르지 않아
세상이 머물러 버렸기 까닭이라 하였다. 중생의 물이 차올라 세상인 배를 띄울
때까지 와불은 구렁에 처박힌 채 기다림의 장소에 머물게 되었다 .
- 황석영의 『장길산』중에서 -
새 세상을 기다리는 민중의 꿈, 와불
올 여름 정확히 10년 만에 아내와 나는 운주사를 다시 찾았다. 10년이란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에 운주사라고 해서 변화가 없을 리 없다. 절 입구의 주변이 공원처럼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일주문이 세워졌다. 또 골짜기 안쪽에 있는 절 건물도 늘은 것
같다. 여느 절 같으면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운주사
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천불산이 그대로이고 골짜기에
숱한 전설을 탄생시킨 기괴한 형상의 돌부처들과 돌탑들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곡 서쪽의 산등성이에 머리를 아래쪽으로 향하고 거꾸로 누워있어 와불(臥佛)로
불리는 두 구의 불상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천 개의 불상 중 마지막에 조성된 것이고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불상이다. 이 와불이 일어서는 순간 태평성대의 새로운
세상 - "세상의 기후는 아주 알맞고 계절의 변화는 순조로워 온갖 질병이 없어지고
사람들은 만나면 서로 즐거워하고 주고받는 말은 고와지며 대소변을 보면 땅이 저절로
열려 파묻히고 금은보화가 땅 위에 널려 있어도 아무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 그때 사람들은 그 금은보화를 놓고 말하기를 옛날에는 이 하잘 것
없는 것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고 가두고 때리며 수없는 고생을 했다며 웃는" -
이 열린다고 했다.
산등성이에 올라 와불을 내려다본다. 소설 속에 운주사의 설화를 인용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적 의지를 다지던 지난 독재 치하와는 달리 사람들의 자유로움은
커지고 경제적 수준도 높아졌다고하지만, 아홉시 뉴스 때마다 반복되는 혼잡한 세상의
너절한 이야기들은 아직도 와불이 일어서야 한다는 시대적 당위를 역설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시대의 고통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참혹했던 지난 7-80년대를 미끈하게 빠져나온
자들이 절망의 가슴을 두드리며 고통으로 세운 그 시대의 ‘불상(佛像)’의 의미를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저울질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무한경쟁의 굴레에 갇혀
허덕여도 시간이 흐를수록 양극화라는 상대적 박탈감이 커져 가는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세상의 도래는 여전히 긴박한 화두일 수밖에 없다.
와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누워있다. 그러나 누워있어 희망스럽다.
일어나지 않았기에 운주사는 미완성의 불사이고 기다림과 설레임의, 꿈의 불사이다.
미완성이란 완성을 향한 과정으로서만 사랑스럽지 않던가. 분명 ‘잔치’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도 걸어가야 할 먼 길로 우리 앞에 누워 있다. 그 길이 다할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식지 않는 가슴으로 곁에 있는 사람과 힘주어 손을 잡는 일일 뿐이다.
바라건대 와불이여 어서 일어서시라.
부디 일어서 새로운 개벽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한바탕 속 시원하게 시작하시라.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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