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돌아보기
지하철을 나와 광장에 서서 서울역 전경을 카메라에 담고 나자 한 사내가 다가왔다.
“선생님, 먹고 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사내의 숨결에서 언뜻언뜻 술 냄새가 풍겨왔다. 존댓말을 쓰고 있었으나 사내의 말투와 태도는 다소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지나쳤다. 그러자 곧이어 사내의 거친 욕설이 뒤를 따라왔다.
노숙자 -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자 모습이 되었다.
옛 서울역사에 다가갈수록 역사 주변 여기저기에 종이상자를 깔개로 삼아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그들이 눈에 띄었다.
소주병을 앞에 놓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초췌한 얼굴, 남루한 복장의 그들은 현대적 감각의 새로운 고속철도 역사(驛舍)에 그 기능을 물려주면서
한 시대를 마감한 옛 서울역사의 문이 닫힌 모습과 함께 역주변의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현재 옛 서울역은 기차역의 기능은 정지되었고 일반인의 출입은 막혀 있었다. 1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숱한 승객들이
드나들었을 중앙홀의 출입문은 잠겨 있었고 그 앞에는 한 노숙자가 길게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중앙홀의 좌우의 외벽에는 ‘서울역문화관’과 ‘철도박물관’이란 노란 글자판이 달려 있었으나 간판에 합당한 어떤 행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도 없어 보였다.
철도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을 걸어 뒤편의 옛 서부역 쪽으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한 대기업의 유통점이 새롭게 들어서 있었다.
유통점의 옥상 주차장에 올라서니 서울역의 뒷모습이 보였다.
앞에서 볼 때와는 달리 주변의 빌딩 숲에 파묻힌 듯 다소 왜소해진 느낌이 들었다.
다시 서울역 광장으로 돌아나오다 보니 노숙자들이 열을 맞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식사 제공 차량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을 하며 지나갔다.
노숙자의 존재가 경제적 성장과 번영의 시대가 남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라면, 서울역(당시는 ‘경성역’)은
지난 일본제국주의의 군사.경제적 욕망이 남긴 일제강점기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고 대륙침략의 발판을 다지기 위해 한반도를 종횡으로 긋는 철도망을 구상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이미 1880년대부터 한반도 전역에 대한 지형과 교통, 민심 등을 철저히 조사하였다고 한다.
철도관계자가 아니라면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날이겠지만 우리나라 ‘철도의 날’은 9월18일이다.
1899년 9월18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된 것을 기념하여 제정된 정부 주관 기념일이다.
경인선은 애초 미국인 모스가 1897년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자금난으로 중단하였다가 일본인이 부설권을 인수하여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철도를 개통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900년 7월 한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가설되고
노량진과 서울역(당시 ‘남대문역’, 현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 중간 지점에 위치) 사이가 이어지면서 서울과 인천이 완전히 연결되었다.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나....
- 독립신문, 1899년 9월19일자 -
경인선이 놓여질 당시 서울과 인천은 육로로 12시간이 걸렸고 수로(水路)로는 8시간 걸렸다고 한다.
이에 비해 철도는 1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니 철도가 당시 사회에 가한 충격은 획기적인 교통수단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 사회 전체의 흔드는 지각변동과 같은 것을 것이다.
때문에 위에 인용한 경인선 기사를 쓴 기자의 감정이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철도의 우렁찬 발진과 빠른 속도의 편리함에 대한 예찬에 앞서 기자가 간과한 사항은 그것이 한반도 침략을
노리고 있는 일본의 장기적인 계획 속에 놓여졌다는 사실이며, 그로 인해 한국 사회가 일본제국주의의 영향력 속으로
신속하게 편입된다는 사실이었다.
경인선의 개통 이래 한반도의 곳곳에는 철도가 개설되기 시작하여 1945년 해방 때까지 총 6,407KM의 철도망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일본에 의한 철도 공사는 시작부터 약탈적이었다.
1901년에 기공식을 한 이래 4년 만에 개통을 한 총연장 444.5KM에 이르는 경부선의 경우 토지보상비용은 총 27만 6천 여원으로
경부철도 건설비 총액의 0.9%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일본 국내 철도 건설시 토지수용비가 총공사비의 13%였던 점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비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 통상적인 철도 건설비가 1마일당 16만 원이었던 것에 비해 경부철도는
10만 6천 원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약탈의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 민중에게 전가되었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남대문역은 ‘경성역(京城驛)’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1925년 8월 지금의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서울역사(‘경성역사’)가 되었다.
‘경성역’은 당시 최고의 교통 수단이었던 모든 철도와 철도역의 중심이 되었고 그것은 곧 식민 통치의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현장임을 의미했다.
때문에 일제는 서울역사를 그 역할에 걸맞은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바 있는 독일인 게오르그 라란데와 일본인 야스시가 공동으로 설계를 맡았다.
야스시의 스승인 다츠노 깅고는 동경역을 설계한 인물이어서 사람들은 ‘경성역’을 ‘작은 동경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3년 2개월의 공사 기간에 공사비는 총 94만 5천원이나 들었다. 그나마 공사비가 모자라 원래 규모의 2/3로 축소된 것이라 한다.
당시 돼지 한 마리의 가격이 4원 미만이었고 경기도의 한 해 토목비 예산이 50만원 정도였다고 하니 서울역 공사에 일제가 들인
공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7만여 평의 부지 위에 연건평 2만여 평의 지하 1충, 지상 2층으로 지어진 서울역사는 중앙에 비잔틴 양식의 돔을 얹은 큰 홀을 두고
좌우에 큰 그릴을 거느렸다. 석재와 벽돌을 혼용하여 마감한 외부는 물론 내부 시설도 당시로선 최고급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특히 2층의 ‘그릴식당’은 최초의 양식당으로 당시는 물론, 서울에 고급 호텔이 들어서기 전인 70년대까지 서울의 '명물'이었다.
처음 세워질 때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서울역사를 보면서 잊을만하면
한번씩 터져 나오는 일본인들의 망언을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일본의 한국식민지 통치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른바 ‘일본공적설’의 해괴망칙한 주장에 동조를 하는 정신 나간 한국인도 있는 형편이니 한국을 다녀가는 많은 일본인들도
일제강점기가 남긴 흔적들은 보면서 혹 같은 생각을 하고 가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기에 그들의 계획 하에 이 땅에서 계획되고 실행된 모든 행위는 - 정치, 경제, 교육 등 - 일본제국주의의 성장을
위한 목적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그 시기에 이 땅에 어떤 가시적인 제도와 시설이 늘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자원의
수탈과 일본 상품 판매 시장의 확대를 용이하게 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경제 성장을 도모한 것이지 결코 우리 민족 경제의
성장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1930년대 이후에는 일본이 대륙침략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철도는 한반도의 자체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라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수탈과 수송의 극대화를 위해 기형적으로 부설되었다. 때문에 그들의 강점기 동안 우리의 민족경제는
왜곡되고 몰락하였으며, 한국의 민중은 더욱 빈곤해져 갔던 것이다.
이미 남대문역이 지어질 때부터 민중의 정서는 이미 일본의 그런 음모를 감지하고 있었던 듯 하다.
당시에 이런 민요가 유행했었다고 한다.
“남산 밑에다 정거장을 짓고 왜놈의 군사가 떼로 밀려온다.”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3.1운동 직후인 제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는 이른바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내걸었다.
일제의 강점이 만들어낸 식민통치가 이미 폭력적인 상황인데, 거기에 ‘문화통치’라는 포장은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꾸밈말이자
수작이었다. 있을 수 없는 주장을 내건 그의 의도는 한가지, 3.1운동으로 격앙된 조선의 민족감정을 호도하려는 것뿐이었다.
1919년 9월2일 그는 부임을 위해 서울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의 ‘잔머리’를 꿰뚫어본 한 조선인의 폭탄 세례를 받게 된다.
그것은 3.1운동 내내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에 죽음으로 내몰린 조선민중이 취할 수 있는 정당방위의 행동이기도 했다.
삼엄한 일본군의 경계를 뚫고 던진 강우규의사의 폭탄은 애석하게도 사이토를 격살하지 못했지만
그 자체로 조선인의 의지와 기개를 세상에 확고히 드러낸 의거였다.
1855년 평남 덕천에서 태어난 강의사는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보고싶지 않은 사람,
보고싶지 않은 물건’ 이라며 만주로 건너가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교육에 전념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에 가입하여 그 대표로 신임총독을 살해할 목적으로 귀국하였다.
일제의 폭력 통치속에서 평화적인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강의사는 서울역 주변에서 유숙을 하며 현지 답사를 하는 등 면밀한 준비를 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환갑을 지난 지도 오래인 64세였다.
그는 기록이 전하는 최고령의 독립투사이다. 사건이 터지자 일제는 범인을 찾느라 법석이었지만 노인 행색의 강의사를
범인으로 상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인의 집으로 숨어다니던 강의사는 사건 발생 15일만에 일본인 앞잡이로
악명이 높던 김태석에 붙잡히고 만다. 일제에 의해 사형이 확정되 뒤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강의사는
면회온 아들에게 감동적인 말을 남긴다.
사람이 한번 나면 죽는 것이다. 네가 나의 사형받는 것을 슬퍼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 나는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아무 일도 이루어놓지
못하였음을 슬퍼할 뿐이다.
그는 1년간의 옥살이 끝에 1920년 11월 29일 오전 9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짧은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斷頭臺上 사형대에 홀로 서니
猶在春風 춘풍이 감도는구나
有身無國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豈無感想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서울역사의 왼쪽 홀 앞쪽에 “강우규의사항일의거자리”라는 이름의 작은 표지석이 있다.
예전에는 서울역의 남쪽광장 역출구 부근에 있었는데 고속철도 역사가 들어서면서 자리를 옮긴 듯 하다.
그러나 예전의 자리나 지금의 자리 모두 강의사의 의거가 행해졌던 정확한 자리는 아니라고 한다.
당시의 남대문역은 서울역사와 염천교의 중간지점에 있었다고 하니 의거가 있었던 현장은 지금의 서울역사 앞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들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침략 행위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인식은 오늘의 한일 관계를 이해하고 규정하는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동시에 그러한 범죄행위에 목숨을 바쳐
항거했던 선열들의 고귀한 삶은 인류의 소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받들고 널리 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작은 것 하나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는 엄격한 사실 확인 작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이기도 할 것이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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