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삼선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장기 집권의 포석을 깔았다. 그것만으로 모자라 1972년
이른바 '10월유신'을 선포하여 영구집권의 욕망을 노골화 한다.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들끓어오르자 '긴급조치' 라는
극약 처방까지 휘두르게 된다. 1974년 1월부터 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총 9회의 긴급조치가 발동되었고 사람들은
이 시기를 흔히 '긴조시대'라고 부른다.
긴급조치의 내용은 주로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비방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시에는 영장없이 체포와 구금이 가능하며
최고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통치방식에 따르지 않는 국민들에겐 어떤 극형도 불사하겠다는
대국민 공갈협박이자 정치사상 초유의 폭거였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저항이 끊임없이 계속되자 박정희 정권은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을 잡아들여 잔인한 고문으로 사건을
날조하며'붉은 이념'의 덫을 씌우기 시작한다.
시인 김지하는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구속 10개월만인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그러나 석방 27일만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된다.
몇가지 명목상의 혐의를 추가했지만 핵심은 출옥 후 계속되는
김지하의 '인혁당 사건 진상'에 대한 증언을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잿빛 하늘 나직히 비 뿌리는 어느 날, 누군가 가래끓는 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나는 뺑끼통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 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소리로 물었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하재완입니다.”
“하재완이 누굽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인혁당입니다”하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물론 가짜입니더”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 나와 버리고 부서져 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저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 달라고 합디더”하고 하씨는 덧붙이더군요.
- 김지하의 「고행...1974」중에서 -
중앙정보부는 유신 선포 이후 반대투쟁의 주도세력으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을, 그 배후로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했다. 사실 두 조직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이 사건을 날조하여 해방 이후 사상 최고인
천여 명을 검거, 조사하고 그중 180여 명을 구속했다.
조사의 과정에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음은 물론이다.
민청학련과 관련하여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 중 김지하를 비롯한
5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인혁당 관련자 -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 이수병,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등 8명은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판결 후 불과 20시간만인 1975년 4월9일
전격적으로 형이 집행되었다.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들의 부도덕성이 공개되어
맞닥뜨릴 치명적인 피해를 우려한 정치 권력과 그에 기생하는
사법 권력이 선고와 집행을 서두른 탓이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인혁당 관련자 모두는 30여 년이 지나서야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김원일의 소설「푸른혼」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다. 삼십 여년 전에 이 땅에서 일어났던 일을 담담히 적어간,
그 시절 '막장 권력'의 전횡이야 너무 자주 들어서 어쩌면 이젠 특별나달 것도 없는,
그래서 혹자는 지겹다고도 말할 수 있는, 줄거리의「푸른혼」을 읽는 일은,
그러나 아직도 유효해 보인다.
그 끔찍했던 시기를 분홍빛으로 덧칠하려는불순한 시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전 대통령 30주기 추도식에서 박근헤
전 한나라당 대표는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
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건 자식된 입장에서 부모에 대한 개인적인
자부심을 갖는 것까지야 뭐라 할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치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지나간 시대를 평가한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덕목으로 받아들일 수 없겠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미래를 바라보는 전망과 같기 때문이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그 시기에 있었던 경제적 성장의 의미를
부풀려 돌아보려는 일각의 시도는 우려를 넘어 개탄스럽다.
경제개발의 공이 독재자 박정의 한사람의 몫인가도 면밀히 따져
보아야 할 일이지만, 천만번의 양보해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집권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그의 행적은 그 무엇으로도 상쇄될 수 없는 일이다.
생명과 자유라는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가치보다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여러 기록을 통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
집권 말기에 월 10회꼴로 젊은 여성들과 함께 열렸다는 이른 바
'궁정동 안가'에서의 연회는 차마 거론하기 거북하여 접어두지만,
부마항쟁을 비롯한 민심의 동향을 두고 그의 마지막 날들에
권력의 심층부에서 오고 갔다는 말들은 우리를 섬찟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앞으로 서울에서 4.19와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겠다." (박정희 전 대통령)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 정도 죽여도 까딱없었는데, 데모대원
1-2백만명 죽여도 걱정없습니다."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 (차지철 경호실장)
-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중에서 -
국민을 우러르기는커녕,
목숨을 건 항쟁의 의미조차 헤아리지 못한
독재자의 꿈이 '복지국가'였다니 수긍하기 힘들다.
내겐 권력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독선 이외에 아무 것도 읽히지 않는다.
정치지도자로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그런 부정한 권력에
대해 냉철한 비판으로 준엄한 청산과 단절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신에
틈이 날 때마다 미화작업성 발언을 하는 것은 좀 께름칙해 보인다.
혹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 오히려 그 후광을 입고자하는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런 미망에 사로 잡혀 있다면
우리는 정치지도자로서의 그녀를 여전히 '독재자의 딸'로 부를 수
밖에 없겠다.
억울하게 숨져간 분들의 명복을 빈다.
(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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