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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빠른, 그러나 오래된 여행

by 장돌뱅이. 2013. 12. 2.




딸아이가 다녀갔다.

짧지만(혹은 짧아서 더) 달디 단 시간이 흘러갔다.

아내는 미국에서 좋은 풍경이나, 재미있는 공연이나, 맛있는 음식이나,
예쁜 옷을 보거나 하면 늘 딸아이의 이름을 들먹이곤 한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고르면 좋았을 텐데......”
“좋았을 텐데.....좋았을 텐데.....좋았을 텐데.....”

딸아이가 머무는 단 며칠 동안 아내는 꼽아두었던 그간의 ‘안타까움’들을 농축해서
소화해야 했다.
개학 하루 전날 방학숙제를 끝내야 하는 초등학생처럼 시간이 초조할
정도로
바쁘게 지나갔다. 그래도 매 순간마다 잘 익은 달걀의 노른자처럼 보드라운 감촉이
만져질 것 같은 시간이었다.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에 먹은 IN & OUT 버거도 미국의 흔한 패스트후드가 아니라
아내의 계획 속에서 오래 숙성된 ‘슬로우푸드’였다. 

 

 

숙소로 정한 VDARA HOTEL에서는 우리가 요청한 커넥팅 룸 대신에 느닷없이 스위트룸으로
무료업그레이드를 해주는 행운을 제공해 주었다. 두 개의 방을 잡은데 대한
보너스였을 것이다.

좀 과장을 붙이자면 메아리가 들릴 정도로 큰 방이었다.
두 개의 욕실과 침실과 분리된 거대한 거실,
식사를 사먹기로 한 터라 별 필요는 없었지만 식탁과 주방시설,
그리고 역시 별 소용은 없었지만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커다란 유리로 내다보이는 풍경 또한 시원스럽기 그지없었다.
벨라지오 호텔과 호수가 가까이 내려다 보였다.
 
이런 곳에 하루만 묵는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하지만 오래 억울해야 할 사이도 없이 예약을 해둔 KA쇼 공연시간에 맞춰 호텔을 나서야 했다. 

 

 

극장에는 아내와 딸아이만 들어갔다.
전에 본 공연이므로 나는 '이중과세'를 피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에 나는 극장 앞 ‘기계’에 앉아 티켓 값을 벌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이 날은 역시 운이 좋은 날이었다.
전에 없이 '기계'는 온순했다.
티켓값을 상회하는 금액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양보해주었다.
나는 공연 관람을 마치고 나온 아내와 딸아이에게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거액이(?) 찍힌 바우처를 의기양양하게 보여 주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야!” 



카쇼가 있었던 MGM을 나와 우리는 라스베가스의 큰길, STRIP을 따라 걸었다.
라스베가스의 밤의 불빛은 늘 그렇듯 호사스러웠다.

 

 

호텔 ARIA의 태국식당 LEMON GRASS에서 맥주를 곁들여 식사를 했다.
숙소에 들기 전 잠시 이번엔 식구들이 저마다 기계 앞에 앉아 보았다.
그러나 이번 기계는 모두 강자였다. 우리의 지폐를 배고픈 염소처럼 흔적 없이 먹어치웠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결국 옛 노래 가사처럼 ‘인생은 나그네길’이었다.
아니 라스베가스의 카지노가 그렇던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하는.’  

 

방에서 내다보는 라스베가스의 밤풍경은 또 다른 눈 호사였다.
딸아이가 방의 불을 끄자 창밖의 불빛은 한결 또렷이 살아나 방에까지 들어왔다.
뒷날 아침 딸아이는 이제껏 여행 중 가장 큰 방에 혼자 자보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시차가 있어 쉬이 잠이 오지 않아 침실에서 책상으로 식탁으로
소파로 맴을 돌며 컴퓨터도 하고 카톡도 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느긋한 아침을 먹고 아내와 딸아이가 이른바 ‘명품점’을 눈으로만 구경을 하고 온 후
우리는 엘에이 다져스 구장을 향해 출발을 했다.
연애 시절 아내는 고교야구의 팬이었다.
딸아이는 지금 한국 프로야구의 극렬팬이다.
축구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야구를 좋아하니 이국에서 보는 류현진선수의 경기는 만장일치의 선택이었다.
 

 

 

 

딸아이는 다져스 로고가 새겨진 모자와 류현진의 “RYU”가 새겨진 셔츠를 사 입었다.
다져스구장의 명물이라는 핫도그 “다져독”에 맥주를 마시며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
때때로 안타까운 탄식을 반복하다보니 경기가 끝났다.
밤늦어 한가한 프리웨리를 두 시간 남짓 달려 샌디에고로 돌아왔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일요일인 뒷날을 믿고 맥주를 나누며 경기의 여운을 씻었다.
 

 

 

나머지 일정은 아내와 딸아이의 쇼핑, 나는 운전수와 포터의 시간.
그리고 공항의 이별. 

 

딸아이와 나는 아내에게 빨리 울라고 짓궂게 장난을 쳤다.
아내는 웃기만 할 뿐 예전과는 달리 무반응이었다.
그러나 딸아이가 보안검색대로 사라지고도 한참을 더 대합실에 서 있다가
공항을
나오는 도중 ‘잘 있으라’는 딸아이의 문자를 받자 기어코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버리려고

   누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신용목의 시, "민들레"-

(2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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