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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6

내가 읽은 쉬운 시 122 - 김광규의「도다리를 먹으며」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 해서 우리 대통령과 회의를 하고 우리의 다른 반쪽인 북한의 지도자를 만났다. 기자 회견장을 채운 화려한 말잔치의 정치적 이면과 속셈을 읽어낼 지식과 재주는 내게 없다. 다만 그의 무소불위의 힘과 행보가 이 땅에 오래 헤어진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실향민들에게 고향을 찾아주고, 높은 철조망을 걷어 비무장 지대를 남과 북 끝까지 넓히고 무기를 내려 핵폭탄도 핵우산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단초라도 남기고 갔으면 하는 '순진한' 바램을 가져볼 뿐이다. 어쨌거나 만남은 결별보다, 대화는 욕설보다, 비싼 평화가 싼 전쟁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가 수십 대 차량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서울 한 복판을 달리는 도로변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열심히 흔드는 ('미국인보다 미국을 더 사랑하는' 듯한) .. 2019. 6. 30.
내가 읽은 쉬운 시 121 - 오세영의「그릇」 '내가 드디어 그릇을 샀다'는 글을 본 지인이 "그릇 자체의 아름다움도 매혹의 영역이지만 그 담김의 상상이 결국 그릇의 매력"이라는 격려의(?) 글을 보내주었다. '담김의 상상'이란 말이 좋아서 나는 며칠동안 틈틈히 마음 속으로 되새기며 다녔다. 담김만큼 담김이 만들어낼 관계에 대한 상상이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신영복 선생님의 글 "당무유용" 노자(老子)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埏埴以爲器當其無有器之用(선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즉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그릇의 쓰임이 생긴다"는 뜻이다. 노자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무엇인가 담길 수 있는 '비어있음'의 가치가 모양과 색상, 무늬와 질감 등의 '유(有)'보다 본질적이거나 최소한 상호보완적이.. 2019. 6. 29.
내가 읽은 쉬운 시 120 - 김정환의「닭집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달력에 앞서 자연의 변화를 보며 씨를 뿌리거나 수확하는 시기를 감지한다고 한다. 감꽃이 피면 올콩을 심고, 감꽃이 지면 메주콩을 심는다거나 진달래가 피면 감자를 심고, 고추잠자리가 날면 배추를 심고, 옥수수의 수확 시기는 새 파먹은 자국을 보며 안다고 한다. 농민에는 못미치겠지만 비슷한 감각과 지식으로 아내는 제철의 식재료를 기억하여 일년 먹을 양식거리를 준비한다. 몇년 새 내가 부엌 살림을 한다고 수선을 피우지만 사실 상차림의 기본을 이루는 음식들은 여전히 아내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유월만 해도 아내는 메실장아찌와 메실청을 만들고, 들깻잎을 절이고, 햇마늘을 갈아 냉동실에 저장하고, 오이지도 담궜다. 시기를 놓치면 할 수 없는 것들이라며. 그러다보니 집에서 가까운 대형마트 대신에 .. 2019. 6. 28.
내가 읽은 쉬운 시 119 - 유홍준의「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용인의 SALAFARM과 서울 먹거리창업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가져온 화분 두 개. 상추와 애플민트가 우리집에 와서 죽거나 죽어가고 있다. 상추는 좀 예민한 품종이라 해서 교육 받은 대로 나름 신경을 썼으나 황달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이파리를 눕히고 자리보전을 한 끝에 일어서지 못해 화단에 묻어주었다. 그다지 신경을 안 써도 잘 자란다고 해서 가져온 애플민트도 잎이 흑갈색으로 말라 떨어지는 모양이 다시 건강해질 것 같지 않다. 응급처치로 교육 중 나눠준 커피찌거기로 만든 거름을 주었으나 그다지 효험이 없어 보인다. 나의 무지함과 부실한 보살핌에서 비롯된 것이라 안타깝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매일 부엌에서 만드는 음식도 따지고 보면 무언가 죽은 '재료'이지 않는가. 개구장이 우리에.. 2019. 6. 25.
내가 읽은 쉬운 시 118 - 박규리의 「죽 한 사발」 날씨가 더 없이 좋았던 주말. 오래간만에 후배와 부부 동반으로 만나 가벼운 산책을 했다. 후배 부부는 우리처럼 미국 샌디에고에서 산 경험이 있다. 그래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을 "와! 꼭 샌디에고 날씨 같애." 라고 표현할 때 그 말 속에 들어있는 풍경과 감성과 추억을 격하게 공감할 수 있다. 공감할 부분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흥겹다. 산책 후 단골 북카페에 앉아 커피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서없고 부담도 없는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신명나게 이어졌다. 만나는 내내 후배 부부는 변함없이 '꽁냥꽁냥'의 흐믓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잤다. 아내와 둘이서 동이 틀 무렵까지 사촌형수가 보내준 햇마늘을 깐 탓이었다. 커튼을 여니 하늘이 어제처럼 눈부셨다. 바람에 .. 2019. 6. 24.
내가 읽은 쉬운 시 117 - 김수영(金秀映)의 「오래된 여행가방」 아내와 여행을 하면서 간단한 기념품을 사곤 했다. 여행지를 주제로 한 그림이나 인형, 미니어쳐, 책, 사진엽서, 차(茶) 등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에 드는 것을 그때그때 사서 모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눈에 잘 띄는 곳에 그것들을 걸어놓거나 늘어놓고 오며가며 바라보면 즐거웠던 여행의 여운이 감미롭게 이어졌다. 그러다가 수집품에 좀 더 실용적인 목적도 더해보자는 취지에서 컵으로 바꾸었다. 음료나 커피를 마실 때 그 컵을 사용하며 여행의 추억을 떠올려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컵은 모양도 크기도 색도 여행지만큼이나 다양했다. 나중에는 한두 개씩 사던 스타벅스의 컵으로 시나브로 촛점이 맞추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저것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점차 기념품이 늘어났다. 그러지 않아도 비좁은 집의.. 2019. 6. 22.
발밤발밤47 -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 광주 지역은 예전에 양질의 백토가 생산되고 땔감이 풍부한데다 한강과 경안천을 이용한 제품 수송이 편리하여 도자기 생산의 적지였다. 또한 아름다운 기품을 보여주는 조선 백자의 탄생지이기도 했다. 광주시의 경기도자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 전시회를 보러 갔다. 1. 식당 "마당 넓은 집" 마침 점심 무렵이라 들어간 "마당 넓은 집"은 소백산 한우가 주 메뉴였다. 그런데 주메뉴보다 보조(?) 메뉴인 나물 반찬이 더 유명하다고 한다. 채식 선호의 아내에 맞춤이라 생각했더니 나물만은 팔지 않고 소고기를 주문해야 따라나온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나물을 먹기 위해 소고기를 주문해야 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예상 밖의 거한 점심이 되었다. 열다섯 가지가 넘는 종류의 나물이 나왔다.. 2019. 6. 21.
내가 읽은 쉬운 시 116 - 로버트 프로스트의「목장」 아내와 잠실 석촌호수 둘레길을 걸었다. 벚꽃이 피었을 때만 와보았던 터라 초여름의 녹음이 무성한 시기는 처음이었다. 나뭇잎이 예쁘게 초록의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동호와 서호로 이루어진 석촌호수 전체 길을 한바퀴를 돌고 동호는 한바퀴를 더 돌았다. 평탄한 길이라 기분 같아선 몇 바퀴라도 더 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동호에 있는 노천 카페를 눈여겨보다가 자리를 잡고 호수를 건너다 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아내와 하는 즐거운 놀이 - 향후 몇 년 간의 여행 계획을 적어 보았다. 라오스, 발리, 태국 등의 동남아와 호주,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 그리고 미국 (우리가 살던 서부로 갈까 아니면 동부로 갈까는 미정으로 남겨둔 채). 물론 실현 가능성과 상관없이 그야말로 상상 속의 계획일 뿐이다. 하지만 이.. 2019. 6. 19.
내가 읽은 쉬운 시 115 - 박정만의 「작은 연가(戀歌)」 금요일 저녁. 백수에게 주말과 주중이 다를 리 없건만 한결 마음이 느긋해진다. 아직 '직장물'을 미처 못 씻어냈다는 뜻인가. 서쪽 노을이 붉다. 바람도 선선하여 앞뒤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고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한다. 오늘 저녁은 준비할 게 크게 없다. 조리공부 시간에 만들어 싸가지고 온 음식을 데우면 된다. 오미자소스 돼지갈비찜과 쭈꾸미미나리무침, 그리고 새송이버섯장조림.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는 등 뒤 식탁에 앉아 낮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한다. 친구의 딸 결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로 부모의 은근한 염려를 받더니 드디어 짝을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이 다 스노우보드 매니아라 신혼여행도 미루었다가 우리나라가 한 여름일 때 보드를 타러 지구 남반부로 간다고. 젊은 세대답다는데 아내와 동의.. 2019.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