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술만 더 먹어보자
"잘 먹어야 혀."
장돌뱅이.
2022. 9. 16. 11:39
퇴원 후 처음으로 병원에 갔다. 의사가 지정해준 외래 검진 날이다.
거동이 불편한 아내로서는 우선 병원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열흘 전 퇴원할 때는 침대로 누워서 이동할 수 있는 특수구급차를 불렀다. 그런데 병원에서 집까지 불과 5분 이내의 거리를 이동하는데 가격이 7만5천원이라고 했다. 병원 직원의 말로는 보건복지부 지정 가격이라고 했다.
억울하지 않으려면 아프지 말아야 한다. 허리에 착용하는 지지대만 해도 그렇다. 의사가 필요하다고 지시하고 업자는 와서 칫수를 재고 가격을 통고할 뿐이었다. 인터넷의 가격보다 월등히 높았지만 환자의 의견을 제시할 틈이나 네고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걸을 때 사용하는 이동보조기도 마찬가지다. 직접적인 의료 행위는 아니지만 환자에게 필수불가결한 이런 것에 의료보험을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것인지.
다행히 아내의 허리가 퇴원할 때보다 나아져서 누워서 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수그리는 자세는 피해야 해서 밥도 서서 먹는 상태라 몸을 구부려야 하는 승용차에는 태울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타다 택시'에서 높이가 있는 대형 RV 차량인 '넥스트'를 불렀다. 아내는 큰 불편 없이 차에 탈 수 있었고 이동 중에도 편안해했다.
X레이를 찍고 주치 의사의 '판정'을 기다렸다.
흑백 판화 같은 사진을 가리키며 의사는 많이 좋아졌다는 해석을 해주었다. 어디가 어떻게 좋아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 저녁으로 복용하던 약이 더 이상 필요없다는 사실은 희소식이 분명했다. 그 말 한마디에 그간의 시름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잘 먹어야 혀."
입원 중 만났던 옆 침대의 할머니 말처럼 이제부터는 잘 먹고 부지런히 걷는 일만 남았다.
그간 아내에게 걷기를 조급하게 채근하다 티격태격한 적도 있다. 앞으로는 느긋하게 재활 노력은 아내에게 맡겨두고 나는 음식을 만드는 일에나 골몰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고가 있기 전에도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과정은 아내와 함께 보내는 중요한 일상 중의 하나였지만 활동 반경이 집안으로 제한된 요즈음은 그 비중이 더 커졌다. 그동안 아내에게 합격점을 받은 음식들을 한 번씩 복기를 해가며 만들어볼 참이다.
나는 단짠단짠의 초등 입맛이지만 아내는 재료 본연의 은근한 맛을 좋아한다. 음식을 만들 때마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타협점을 찾는다. 하지만 아내의 입맛을 고려해서 식초와 설탕과 간장은 레시피보다 조금씩 덜 넣는다. 나는 국물을 좋아하고 아내는 건더기를 좋아한다. 세상에서 나만 알고 있는 그 세세한 점에 나는 뿌듯한 자부심을 가져보기도 한다. 은퇴 후 (나 스스로를 포함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본격적인 부엌살림 떠맡기에 나설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움직여준 그분께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식사 준비를 책임지고 나선 뒤에도 김밥 만들기는 아내의 몫이었다. 나는 옆에서 보조 역할만 했을 뿐이다. 딸과 나는 아내의 김밥이 '우주 최강'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전 과정을 내가 했다. 김밥의 종류도 아내와는 다른 것이었다. '내 께 더 맛있는 거 같은데?' 하는 오만을 부려보기도 했다.
EBS "최고의 요리비결"에서 '득템'한 가지조림. 아내가 언제나 환영하는 반찬이다.
알록달록 색상도 예쁜 (양념김)볶음밥.
제주도에서 농약을 안치고 키워서 껍질도 먹을 수 있다고 하길래 함께 갈았더니 전복죽 색깔이 되었다.
올해는 날씨 탓에 복숭아 농사가 별로란다. 해마다 주문했던 곳에서는 아예 상품으로 팔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냥 지나가나 했는데 청도가 고향인 친구가 한 상자를 보내주었다. 나의 요리 스승님이라 할 한명숙 선생님이 알려준 복숭아땅콩무침을 만들어 보았다.
'이런 음식도 있구나'하는 신기한 감정이 맛에 더해졌다.
돼지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내가 만들어준 고추장삼겹살엔 늘 만족을 표시한다.
추석과 설날이면 아내는 갈비찜을 만들었다. 손자를 포함한 딸아이네를 위한 명절 음식이다.
올해는 그럴 수 없는 입장이라 대신 내가 등갈비감자탕을 만들었다. 명절 음식으로는 안 어울리지만 '명절 음식이 별 건가? 딸과 사위가 좋아하면 그게 정답이지.' 누가 묻지도 않는데 스스로를 위안했다. 거기에 해물잡채와 손자를 위한 닭백숙을 만들었다. 지난여름에 손자가 매우 잘 먹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손자는 엄지척을 해주었다. 해물잡채는 재료만 사진을 찍고 정작 완성품은 찍질 못했다. 영계백숙은 아예 사진도 찍지 못했다. 손자만 만나면 이렇게 자주 혼쭐이 빠진다.
환자에게 인스턴트식품은 미안하지만 아내가 좋아하고 숙주나물도 넣었다고 변명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