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덕분에 아내와 둘이서 집에서 한가로이 보냈다. 커피를 마시며 차분한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다가 나중에는 유튜브로 <태양은 가득히>, <부베의 연인> 같은 옛 영화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다. 알랑 드롱의 앳된 모습을 보며 그 시절 아내와 나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점심으로 고구마를 쪄서 먹었다. 찐고구마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고 군고구마는 연애시절 아내를 생각나게 한다. 길거리에서 군고구마를 사 먹은 적은 많지 않지만 군고구마를 볼 때마다 늘 '맛있겠다'는 하고 말했던 것 같다. 캠핑 갈 때마다 고구마와 고구마를 굽기 위한 알루미늄 호일은 필수였다.
칼림바를 꺼내 실로폰처럼 맑은 소리를 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낙서하듯 그림도 그려보았다. 칼림바며 그림이며 다 백수가 되고 난 후에 시작한 거라 어디에 내놓을 만한 솜씨는 못된다. 그래도 손에 쥐고 놀다 보면 시간이 꽤 잘 간다. 즐겁게 간다. 아내는 붓글씨를 하는데 나보다 열심히 하고 모양새도 더 낫다.
저녁에는 애호박덮밥을 만들었다. 아내는 조금 맵다면서도 맛있게 먹어주었다. 내 음식을 평가하는, 중요한 사람은 두 명이다. 바로 아내와 손자저하이다. 아내보다 손자저하의 평가는 냉철해서 늘 긴장이 된다. 아내는 맛이 좀 부족해도 '남이 해 준 음식은 다 맛있다'고 넘어가는데 반해 손자저하는 한 번 불합격된 음식은 다시는 상에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맨 마지막으론 졸면서 손흥민의 프리미어 경기를 보았다. 토트넘은 요즘 부진하다. 손흥민도 골은 넣었지만 크게 빛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루를 보낸 날엔 도종환의 시를 자주 떠올려 보곤 한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