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 낮동안 아내가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하면 타박 투로 말하곤 했다. "몸에 좋지 않다고들 하는데 그걸 왜 먹어?" 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아내는 건강을 염려하는 명분에 밀려서인지 "어쩌다 한번 먹는 건데 뭐." 할 뿐 크게 반대 주장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지나 내가 부엌살림을 맡으면서 가끔 점심으로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거나 음식을 만들기가 싫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 외식을 하는 것도 귀찮을 때면 간편한 라면이 생각난다. 그럴 때 나는 과거 나의 '망언'을 떠올리며 어쩔 수 없이 좀 비굴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제안을 한다. "오늘···점심은 라면이······어떨까?" 입장이 반대라면 나는 아마"왜에? 요즘 라면은 건강에 좋아졌나?" 하고 비꼬겠지만 아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지 뭐." 하고 경쾌히 받는다. 나는 제풀에 캥겨서 내가 만들 건 일반 라면이 아니고 볶음라면이라고 구구절절이 설명을 한다.
볶음라면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라면 한 개를 국수처럼 삶아 건져두고 냉장고 속을 뒤져 있는 각종 야채들을 꺼내 적당량 채 썬다. 달군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다진마늘을 타지 않게 볶다가 채 썬 재료들을 넣고 함께 볶는다. 양배추, 숙주, 쪽파, 대파, 양파, 버섯, 당근, 베이컨이나 햄도 괜찮다. 앞서 끓여둔 라면과 소스(맛술 1T, 굴소스 1T, 참기름 1t, 후춧가루 약간)를 넣고 한번 더 볶는다. 그릇에 담은 후 가쓰오부시가 있으면 올려도 괜찮다.
꼬불꼬불 산길 즉석 라면 배낭에 담고 성큼 아빠 발자국 따라 종종종 올라간다.
차오른 숨 힘 빠진 다리 배속에선 꼬르륵
"아빠, 라면 먹고 싶어." "산꼭대기서 먹어야 더 맛있지." 올라간다 올라가
아빠주먹만 한 라면이 헉헉 지친 나를 산꼭대기로 끌어올린다.
- 정진아, 「라면의 힘」-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는 요즘 세상에야 위에 인용한 시처럼 라면이 지친 아이에게 산꼭대기로 끌어올리는 힘을 주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주먹만한 라면에 힘을 얻는 아이의 마음이 귀엽고 예쁘다.
짜장면과 함께 라면이 최고의 음식이었던 60년 대의 나라면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다. 누가 산꼭대기에서 라면을 끓여준다면 달려서라도 올라갔을 것이다. 나처럼 라면을 가히 천상의 맛으로 경험한 그 시절의 아내도 그랬을 것이다. 공연한(?) 건강 타령으로 라면을 무시했던 나를 반성한다. 맛있게 먹으면 칼로리가 제로라고 하던가? 맛있게 먹으면 모든 게 건강식이다. 아주 가끔씩은, 신혼 초 아내의 말대로 "어쩌다 한번"은 맛있는 라면을 추억과 함께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