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에 출간된 소설 『제르미날』은 19세기 말 프랑스 북부 탄광지역 노동자들의 생활과 파업을 그렸다. '제르미날'은 '파종의 달,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에밀 졸라는 '새로운 인간의 자라남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겹게 일하면서 발버둥치는 노동자들의 노력' 과 '4월의 봄날에 낡은 사회가 해체되어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것을 담을 수 있는 제목을 고민하던 끝에 '제르미날'을 찾았다고 한다.
땅속 깊은 곳에서 광부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곡식의 낟알처럼 땅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제 머지 않아 어느 날 아침, 들판 한 가운데서 그 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게 될 터였다. 그렇다. 인간들이 자라나는 것이다. 정의를 바로잡을 한 무리의 인간들이.
소설은 마외 가족의 일상을 통해 광부들의 탄광촌 생활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집필 전 직접 탄광에 들어가볼 정도로 밀착 취재를 한 작가의 성실성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마외 일가는 무려 106년에 걸쳐 5대가 대물림으로 탄광일을 해왔다. 사고로 죽은 사람만 6명이고 다쳐 불구가 된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노인부터 코흘리개 꼬마에 이르기까지 막장 속에서 일을 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늘 먹을 빵은 부족하고 인간적인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마저 얻지 못하고 산다. 에밀 졸라는 그들의 모습을 인간이 아닌 '고깃덩어리'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반면에 거대하고 안락한 저택에서 사는 부르주아 계급의 삶은 호사스럽고 여유롭다.
소설은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대두될 자본과 노동의 투쟁'을 그리고 있지만 노동이나 이념 소설이라고만 한정 지을 수 없는 방대함과 세밀함을 동시에 담고 있다. 노동자들은 민중의 전형으로 이상화되어 있지 않다. 파업의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와 점진적인 개혁주의자, 초보 마르크스주의자가 갈등을 일으킨다. 부르조아의 이면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노동자와 부르주아, 국가의 폭력, 거대 자본과 소자본, 남성과 여성, 성과 사랑 등 단순화 할 수 없는 여러 문제들이 얽히고 격렬하게 부딪힌다.
졸라는 1885년 12월 한 신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조심하십시오. 땅 아래를 내려다 보십시오. 그곳에서 일하며 고통받는 저 가엾은 이들을 똑바로 직시하길 바랍니다. 어쩌면 아직은 결정적으로 대재앙이 닥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둘러 공정함을 행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머지 않아 닥칠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땅이 갈라지고,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혼란이 야기되어 모든 나라들이 땅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될테니 말입니다. (···)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는 유일한 소망은 연민의 외침과 정의의 외침이 이 땅에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만약 땅이 계속 갈라져 예고된 재앙이 내일 세상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면, 그건 그들이 내 말을 귀담이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