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태국

2024년 10월 푸껫 3

장돌뱅이. 2024. 10. 25. 10:48

동남아 여행에선 자주 쌀국수로 아침을 시작한다.
쌀국수 하면 베트남 쌀국수 '퍼(PHO)'가 알려져 있지만 나는 30여 년 전 태국 쌀국수로 광활한(?) 쌀국수의 세계에 입문을 했다. 그래서 나는 누가 쌀국수를 말할 때 방콕 스쿰윗 거리의 뒷골목에 있던 노점상을 떠올린다. 첫 기억은 그런 것이다.
   
숙소 식당에선 보통 매일 다른 종류의 국수를 낸다. 오늘은 돼지 내장 국수였다.
직원이 국수를 토렴하고 기본 내용물을 넣어주면 그 앞에 준비되어 있는 생선액젓, 설탕, 고춧가루, 맛간장 등의 양념을 각자 취향에 따라 추가하면 된다. 태국 쌀국수는 베트남 식에 비해 양이 작아 서너 번 젓가락 질로 끝나기 때문에 아침 식사로 제격이다.

아내는 돼지내장이라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평상시에 뷔페식당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럴 땐 편리하다. 각자 따로 또 함께.
국수 한 젓가락을 입에 넣으니 구수한 육수가 느껴진다. MSG로 맛을 내는 것이 태국 국수 맛집의 비결이라는 말이 있어 아내는 만류했지만 나는 국물까지 남기지 않고 들이켰다.

그리고 수영장.
왜 수영장에 누워 하늘을  보면 몸이 나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해파리처럼 근육이 흐물거리다가 녹아 흘러내릴 것 같다.
약한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어차피 젖을 몸인데 무슨 상관이랴.

푸껫 여행에서 가장 불편한 점은 대중교통이다.
해변과 해변, 푸껫 타운과 해변을 연결하는 대중교통편이 없다. 일부구간은 썽태우가 운영하지만 제한적이고 택시가 있지만(예전엔 이것도 없었다. 툭툭(썽태우)가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택시 도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가격이 매우 높다. 미터가 아니라 매번 가격 협상을 해야 한다. 그랩이나 볼트 같은 어플을 이용해도 가격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차라리 호텔 차를 이용하라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이런 불합리는 여행지로서 푸껫에 불리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택시비가 비싸다고 해서 손자저하들의 옷을 사는 기쁨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택시를 타고 쇼핑을 하러 푸껫의 대형 백화점인 센트럴로 향했다.
여행지마다 반복하는 이 일정은 저하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사실 이내와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옷의 색깔과 디자인에 저하들의 얼굴과 체격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비교하며 고르는 시간엔 이름난 여행지를 보는 듯한 흥분이 있다.
그러다 눈이 번쩍 띄게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을 때는 성취감으로 자못 뿌듯해지기도 한다.  


푸껫까지 와서 백화점 쇼핑이 웬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백화점은 날로 번창하는 듯 기존의 센트럴 푸껫 길건너에는 Central Phuket Floresta라는 거대한 매장이 새로 생겨나 있었다.

백화점의 곳곳엔 핼러윈 장식과 상품들로 가득했다.
이제 핼러윈은 크리스마스처럼 온 세상의 축제가 된 것 같다. '근본 없는' 서양 문화의 범람이라며 '말세의 징후'라도 되는 양 혀를 찬다면 갈데없는 꼰대가 될 것이다.
여행을 오기 전 딸아이도 어린 두 아들을 위해 집안을 핼러윈 장식으로 꾸미고 있었다. 

저하들의 옷을 사고 태국요리 소스를 살 때까지는 힘이 넘치던 아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자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선수처럼 지쳐했다. 오전에 수영까지 했으니 아내로서는 강행군이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 두리안과 푸드코트의 음식으로 힘을 불어넣어야 했다.

숙소로 돌아와 오늘은 창 맥주를 한 캔 씩 나누었다.

 색깔도 무게도 없는 것이 손도 발도 없는 것이 오늘을 만들고 내일을 만들고 영원을 만든다 풀잎을 밀어 올리고 강물을 흐르게 하고 단풍을 갈아입는다 누가 그 요람에 앉아 시를 쓰고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린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저 힘으로

- 이기철,「시간」-

시간은 금이라고 한다.
아내와 내가 푸껫에서 지내는 시간은 효율과 생산성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금'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겐 투자개념으로 계량화된 자본주의적 시간도 필요하지만 시간을 잊을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