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단상

기름집 사장님

장돌뱅이. 2024. 11. 14. 11:16

누님이 보내준 들깨를 자루에 담아 집 근처 시장에 있는 기름집으로 갔다.
들깨 껍질 제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업을 아내는 '기피'라고 했고 기름집 늙은 사장도 그렇게 말했다.
껍데기를 제거하는 일이면 '기피'보다는 제피(除皮)가 맞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 사전을 찾아보니 거피(去皮)를 편하게 발음하면서 굳어진 말이라고 한다.
국립국어원 표준 사전에는 올라있지 않은 단어였다.

기름집 사장은 들깨를 보더니 알이 잘아서 두 번 기피를 해야 한다고 했다.
뭐가 다르냐고 물었더니 두 번 기피를 하면 날라가는게 많아서 양이 작아지는 대신 깨끗한 색의 가루를 얻을 수 있고, 한번 기피를 하면 색이 거무튀튀해지고 질감이 거칠지만 남는 양이 많고 건강에는 더 좋다고 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어서 전화를 걸어 아내를 바꿔주었다.
아내는 두 번 기피를 원했다.

앞손님들이 가고 내 차례가 되어 기름집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주인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겠다고 들고갔지만 그의 작업을 지켜보는 게 더 흥미로웠다.
들깨를 볶고 식힌 후 기피를 하고 곱게 가는 작업이었다.

"이런 일엔 보통 사모님들이 오시는데 손님은 오늘 쉬시는 날인가 봅니다."
마침 손님들이 없어 한가해서인지 사내가 말을 건넸다.
"오늘만 쉬는 게 아니라 전  매일 노는 게 일인 백수입니다."
"그래요? 아직 젊으신 거 같은데 ···
···"
사장은 자신의 말이 실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바꿨다.
"뭐
··· 놀면서 지내실 수 있으면야 그게 최고지요. 안 그렇습니까?"
"예, 최고는 아니고 조금 나오는국민연금으로 근근이 삽니다."
"연금이요? 나이가 그래 보이지 않는데."
"아이구 아니에요. 제가 올 예순여덟입니다."
"그래요? 전 50대로 생각했습니다."
놀라움 반, '립서비스 반'의 말투였다.

한번 시작한 대화는 작업을 하는 내내 이어졌다.
사장은 작업 순서에 따라 가게 안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말을 쉬지 않았다.
일흔둘의 그는 60년대 지방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경하여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징글징글헌 고생'을 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미련을 포기할 수 없어  나이가 들어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2008년에는 마침내 대학생도 되었다고.
"제가 08 학번입니다." 
사장의 어투에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배워봤자 기름집에 소용은 없지만 그냥 하고 싶었어요. 자식들 보기에도 떳떳해지는 거 같고. 그 시절에 대학을 나오셨다니 손님은 복을 많이 받고 태어난 겁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세상에 베푼 것보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많다고 자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나만의 복을 운명이나 신의 배려라고 생각하면 기름집 사장의 삶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 다만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 안에서 그는 남다른 선택을 했고, 나는 선택이라는 자각조차 없이 지금까지 그냥 흘러온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사장님이 살아오신 지난 세월도,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시는 것도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보면 사장님은 저보다 더 복이 많으십니다."
나는 그에게 진심을 담은 덕담을 건넸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뚝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한강,「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