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제법 세차게 내리더니 날이 추워졌다. 아내와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 아침 산책을 하다가 커피점에 들렸다. 왜 같은 장소라도 스타벅스가 되면 그냥 카페일 때보다 손님들이 많은 것인지? 제법 이른 오전인데도 '별다방'은 사람들로 이미 만원이다.
따끈한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요즈음 같이 읽고 있는 노벨문학상 작가 한강의 소설을 아내와 이야기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5·18과 4·3. 온 세상을 뒤덮을 듯 내리는 눈. 고립과 단절. 침묵과 정적. 섬뜩한 폭력과 학살. 그 속에 작은 새처럼 연약한 생명들의 처절한 몸부림. 해묵은 상처와 치유. "한 문장 한 문장에 마음이 저리네." 아내는 그래서 읽는 속도가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역사는 건조하게 한 시대를 요약한다면 문학은 그 요약에 피와 살을 붙여 현실의 강으로 돌려보내며 스스로 역사가 된다. 역사는 개별 존재들의 총체로 시대를 규명하고 문학은 개별 존재들의 삶으로 시대의 총체를 드러낸다. 현실로 역사로 문학으로 '소년'은 쉬임없이 온다. 우리는 결코 그 무수한 소년과 '작별'할 수 없다. 절단된 손가락을 봉합한 부위는 딱지가 앉지 않도록 삼 분에 한 번씩 상처를 바늘로 찔러 피를 흘려야 한다고 소설은 말한다. 온전하게 새살이 돋고 끊어진 신경을 잇기 위해선 무수한 고통을 감수하며 깨어있어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빛바랜 옛 책 『해방전후사의 인식 6』에는 이런 글이 있다. 4·3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몇몇 대립축에대한 설명과 수치를 제외하면 설명은 크게 5·18과도 유사하다. 민주와 자유, 통일과 독립은 결국 같은 것이므로 그럴 것이다. 제주 4·3 무장봉기는 중앙 변혁지도부와는 일정하게 독립된 채 비교적 다양한 대립축과 요인(제주도 민중과 육지 출신 서북청년단·경찰 간의 대립, 좌익세력과 우익세력 간의 대립, 통일운동세력과 분단국가 형성세력 간의 대립, 남한민중과 미국·미군정간의 대립 등)에 의해 폭발한 것이었으나 그 본질적 대립축이 분단과 통일, 제국주의와 한국민중이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남한 전체 정세의 한 집중적 폭발이었던 것이다. 미군 점령 기간 동안 미국과 분단국가 형성세력의 제국주의 정책 및 잔혹성·폭력성을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는 없었다. 약 1년간 계속된 항쟁에서 이들은 제주도민의 약 10퍼센트에 달하는 3~4만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대학살극을 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