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를 깎아 먹는다 희디흰 무쪽 한입 베어먹으면 이제 잇몸도 무른 것인가 붉은 피 한 점 선연히도 찍혔다 속이 쓰리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끝을 보고서야 아랫배를 쓸어내린다 문득 이것들 다 옛날 그 겨울밤 다름아닌 그대로다 이렇게도 따라가며 닮아가는가 흑백사진처럼 유년을 더듬는 겨울밤 추억은 문풍지처럼 흔들리며 아련하다
- 박남준,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
연말이면 이런저런 송년회에서 만나는 과거는 종종 가공의 영역에서 이상화되거나 과장, 왜곡되기 일쑤다. 그것은 힘든 현실에서 도피는 될 수 있지만 치유의 힘이 되지는 못한다. 술이 깨고 나면 멀리 간만큼 다시 돌아와야 하는 피로만 남는다. 추억이 힘을 갖고 위로가 되는 건 '그대로'의 지난날과 '그대로'의 현실을 서로 나누며 공감할 때뿐이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