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올바르게 살아가고자 원(願)을 세우고 이를 반드시 성취시키고자 할 때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고 세속의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가겠다는 힘과 믿음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무수한 세월에 걸쳐 지어온 죄업과, 현생에 길들여진 삿된 가치관과 습관은 너무나 두터워 쉽게 그 업장(業障)을 소멸시키기 어렵다. 몇년 동안 익힌 담배도 끊기 어려운데 하물며 다겁생래(多劫生來)로 익힌 탐욕과 애욕을 어찌 쉽게 버릴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이룩된 사회의 구조, 특히 최근세에 들어 이룩된 인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우리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여겨진다.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업장에 감춰진 무한한 능력이 있다. 거짓 가치에 대한 완벽한 거부, 욕망과 쾌락에 찌는 육신에 대한 철저한 부정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신명을 바칠 각오로 싸워나갈 때, 부처님의 원력을 든든한 배경으로 업장을 소멸하고 원을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르게 살려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왜소함을 인정하고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을 입으려는 믿음의 표현이 기도인 것이다.
- 법륜, 『실천적 불교사상』중에서-
부처님을 예수님으로만 바꾸면, 아니 그냥 글 그대로 부처님으로만 읽고 받아들여도 저절로 천주교 교리에서도 벗어나지 않게 되는 기도의 일반적인 원칙으로 보인다.
코로나 팬데믹 때 한번 끊긴 성당으로 좀처럼 발길이 향해지지 않는다. 냉담자가 된 것이다. 요즘은 순화하여 '쉬는 교우'라고 한다지만 나의 경우는 냉담이 더 적절하다. 겨우 하루 한번 묵주기도를 올리는 것이 종교생활의 전부이다. 그마저도 자주 빼먹어 이틀치 기도를 한번에 밀린 숙제 '해치우 듯'하기도 한다.
믿음과 기도의 바탕은 법륜 스님의 글처럼 '자신의 왜소함'을 인정하는 하심(下心)일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대상을 높이는 겸손한 '하심'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도 해야겠다. (해마다 새해가 오면 반복하는, 작심삼일의 상투적인 결심임을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