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단상

아내가 외출한 날

장돌뱅이. 2025. 2. 19. 12:03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기왕이면 저녁까지 먹고 와. 저녁 준비 안 하게."
현관문을 나서는 아내에게 농담을 던졌다.

아내가 외출하고 나면 집 안이 갑자기 휑하게 넓어진다.
약간의 해방감(?)과 함께 한가하다가 심심해진다.

유튜브로 그레고리안성가를 들으며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는다.
혼자 있으면 집중이 잘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내가 없으면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유튜브를 끄고 넷플릭스로 돌려도 시들하다. 

이럴 때 가장 좋은 일은 걷는 것이다. 
집 근처 대학으로 나갔다. 날이 제법 쌀쌀했다.
며칠 동안 푸근한 날씨에 찰랑이던 호수 표면엔 다시 살얼음이 잡혀 있었다. 
윤슬은 얼음 위에서 반짝였다.

졸업이 가까운 모양이다. 방학으로 조용한 교정 곳곳에 축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졸업생들의 사진과 함께 익살스러운 문구들이 가득했다.
같은 과나 동아리의 후배 혹은 친구들이 만든 것인 듯했다.


'라떼'는 없던 풍경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어렸을 때가 있었어요?"
언젠가 어린 손자가 물어서 웃었지만 아내와 둘이서도 서로 물을 때가 있다. 
"우리도 정말 그런 때가 있었던가?"

시간이 참 빠르게 흘렀다.
반백 년 전 저 편이 아내와 나의 대학생 시절이었나 싶게 아스라하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 무교동 길을 달려가던 때.
지하철 계단 위 출구에 설렘처럼 가득한 푸른 하늘.
가로수 사이로 축복처럼 쏟아져 내리던 맑은 햇살.
쑥빛 제복의 황량한 '군바리' 시절.
아내가 걸어오던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한 오월의 언덕.

그리고 허름한 단칸 셋방의 신혼.
출근길의 내 어깨에 실어주던 아내의 따뜻한 시선.
함께 보낸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
가끔씩 떠나는 먼 나라로의 즐거운 여행.

산책을 마치고 던킨 도너츠에 들어가 빵과 커피로 점심을 먹었다.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던킨에 있어. 올 때 이리로 와. 그때까지 책 읽고 있을게"
햇살이 빵집 바닥으로 비스듬히 비쳐들 때쯤 아내가 왔다.
친구들과 만난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향했다.
"저녁에 뭐 먹지?"
내가 고민을 과장해서 묻자 아내가 지체없이 답했다.
"맛있는 거!"
아내가 부엌일을 전담할 때 내가 자주 쓰던 말이다.

싸락눈 싸락눈 쌀밥 같은 흰 싸락눈
깊은 그믐밤 화롯불에 둘러앉아
군밤을 까먹던 그 새까맣던 밤

선잠을 깨어 옛날에 젖는다
한세월 새하얗게 잊었던 일들이
오는가 오기는 오는가
밤거미처럼 내려와서 아른댄다
산다는 일이라니
이렇게 살아 있는 일이라니

- 박남준, 「겨울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