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단상

타이베이 여행 1

장돌뱅이. 2025. 5. 24. 06:33

정말 오래간만에 타이베이 여행이다. 아내가 가장 최근에 다녀온 것이 친구들과 2016년이었으니 10년 전이었고 아마 나는 그보다 더 10년 전쯤에 아내와 다녀온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나 혼자서는 90년대에서 2천년대 초까지 여러번 타이베이를 다녀오긴 했지만 대부분 2박3일이나 심지어 1박2일의, 여행이라고 할 수 없는 업무 출장이었다.

하지만 오래간만이어서 혹은 오래간만이 아니어서 즐거운 것이 여행이다.
공항라운지에서 맥주 잔을 부딪히는 아내와 나의 '출정식' 또한 이미 여행이다. 

타오위안 공항에서 타이베이 시내에 오기까지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입국심사를 무인 심사로 신속하게 통과할 수 있는 'E-GATE' 제도를 사전에 신청하여 나는 아무 일 없이 통과했는데 아내는 이상하게 통과가 안 됐다. 왜 그랬는지 기계를 옮겨가며 시도 해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아내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미 타이완 영토로 들어와버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공항직원와 장소를 옮겨가며 수차례 시도 끝에 통과할 수 있었다.

아내는 이전에 다른 나라에서도 입국심사대의 이상한 까탈에 시간을 지체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럴 때마다 내가 (고의적으로?) 서류에 뭔가를 잘못 기입해서 일어난 일 같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없어진 입국심사서는 여행을 할 때마다 아내의 것까지 내가 전부 작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장돌뱅이는 아무 문제 없는데 매번 자신에게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느냐는 하소연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철을 타기 위해 카드를 똑같이 충전했는데 이상하게 아내의 개찰구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게다가 타이베이까지 가는 기차에 내가 오르자마자 뒤에서 문이 닫혀 졸지에 아내와 이산가족이 되는 황당한 상황도 발생했다. 잠깐 놀라는 사이에 다행히 문이 열려 가까스로 상봉을 할 수 있었다. 대만 관광국이 국외 여행객 유치를 위해서 시행한 여행지원금 추첨에서 아내와 나 둘 다 떨어진 건 '당연한' (불)운이었다. 

'10년은 늙은 것 같다'는 아내의 험난한 입국 과정을 통과하여 시먼(西門)에 있는 숙소에 들었다.
시먼은 타이베이의 명동으로 알려진 곳이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천둥번개와 함께 요란하게 비가 쏟아졌다.

계획했던 식당을 포기하고 비를 피해 숙소에서 가까운 "티앤티앤리(Tian Tian Li)"으로 가야했다.
굴전과 돼지고기덮밥, 그리고 무케익(?)을 먹었다.
인터넷에 요란한 명성만큼 뛰어난 맛은 아니었지만 타이베이의 첫 식사로 만족했다. 

식사를 마치고나자 비가 그쳤다.
아내와 시먼딩(西門町) 거리를 걸었다.
여행자와 현지인들이 뒤섞여 대로와 골목 곳곳을 채우며 흘러 다녔다.

대만 버블티로 유명한 행복당(幸福堂 Xing Fu Tang)이 있었다.
버블티는 은근하게 그리고 행복할 정도로 달달했다.

행복······.
지난 몇 달 동안 개인적으로 잠시 행복해질 때마다 '이래도 되나?' 하고 위축되곤 했다.
주어진 생활에 열심일 뿐이었는데도 어처구니없는 '그 X'의 뻘짓은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몰아세우고 모욕을 가하는데 맹렬했다.  우리는 분노하면서도 슬펐고, 자랑스러워하다간 이내 부끄러워지길 반복했다.

그 기억은 여행까지 따라와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들에 걸핏하면 끼어든다.
여행에선 여행만 생각하며 행복해지고 싶다.
곧 다시 상처도 아물 것이라 믿어보면서.

산에서 내려와서
아파트촌 벤치에 앉아
한 조각 남아 있는 육포 안주로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아 행복하다!

나도 모르겠다
불행 중 다행일지
행복감은 늘 기습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와서
그 순간은
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하면서
그 순간은
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이다.
시간의 기나긴 고통을
잡다한 욕망이 낳은 괴로움들을
완화하는 건 어떤 순간인데
그 순간 속에서는 요컨대 시간이 없다.

- 정현종,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