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단상

백수도 바쁘다

장돌뱅이. 2025. 6. 11. 16:19

나는 학생 때는 공부가 싫었고 회사 다닐 때는 일이 싫었다.
학교를 제 때 졸업하고 34년의 직장 생활을 한 건 순전히 운이다.
공부와 일을 빼곤 다 좋아한다.
물론 좋아한다고 해서 잘하는 건 아니고 끈기 있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작심삼일'의 베짱이 체질이다.

등산을 좋아하지만 백두대간을 종주하지는 않았고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풀코스를 해본 적이 없다. 하프마라톤까지만 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만 DSLR 카메라를 손에 쥔 것은 아주 잠깐이고 지금은 그냥 핸드폰으로 찍고 다닌다. (어떤이는 Dslr을 'Digital Single-Lens Reflex'라는 의미 대신에 '돈지랄'의 약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싼 장비 가격을 비아냥대는 말이다.)

학창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기타를 '이제야 드디어' 배우겠다고 은퇴와 동시에 샀지만 튜닝도 해보지 않은 채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음식 만들기도 좋아하지만 '삼식이' 수준을 면하기 위해 책과 인터넷 속의 레시피를 기계적으로 따라하는 수준이다.

이외에 연극, 영화, 글쓰기, 독서, 운동 등에도 관심이 있지만 특별히 남다른 감각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진 않다. 연극을 해보자고 친구들과 의기투합하여 대본 연습까지 하다가 접은 적도 있고, 코로나 때는  실내에 갇힌 손자 저하들을 위해 마술 강좌를 수강하고 저하들 앞에서 시연을 하기도 했다. 저하들의 환호에 고무되어 동호회에 들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지금은 아주 가끔씩 참석하여 그곳의 고수로부터 한 가지씩 배우는 입장이다.

나의 이런 얕은 깊이의 '오지랖'을 일찌감치 꿰뜷어 본 분은 역시 어머니셨다.
중학교 시절이었던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얘야,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밥 빌어 먹는다고 하더라. 그중에서 한 가지만 제대로 해라."
아내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아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와 사는 것도 다양해서 재밌어" 하며 이해해준다. 아내에게 감사하는 많은 이유 중의 하나다.

은퇴하고 새삼스럽게 느낀 것 한 가지는 가는 곳마다 세상엔 고수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유식한 말로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마술동호회에는 마술 공연뿐만 아니라 아예 마술 도구까지 직접 만드는 고수가 있었다.
(놀랍게도 이 분은 직업 군인 출신이었다.).
영상 강좌에는 전문 촬영 기사 출신이 수강하러 와 있기도 했다.
(이런 분이 왜 아마추어들의 영상 강좌를 그것도 초급반에 와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커피를 배우러가니 숭늉으로도 커피를 만들 것 같은 이론과 실기로 무장한  바리스타들이 김연아나 김태희가 선전하는 봉다리커피의 차이를 꿰뚫고 있는 나를 기죽게 했다.
와인 모임에서는 드라이, 페어링, 바디감 어쩌구저쩌구 하는 명왕성 언어들이 날아다니며 소맥 폭탄주의 황금 비율과 회오리를 일으키는 부드러운 손목 스킬의 '달인'인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제길! 그래봤자 '신의 물방울'도 술 아닌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수업 중에 그린 그림

주민센터에서 연 어반스케치 강좌의 수강을 신청하고 첫 수업을 마쳤다.
트레이스, 그리드, 컨투어니 하는 생소한 용어들이 나왔지만 차 종류 잘 안다고 운전 잘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그냥 그렸다. '오지랖' 천성인 나는 재미있었다. 

수업 전 강좌를 신청한 각자의 이유를 발표했다.
나는 "블로그에 여행기를 쓸 때 사진 대신에 손으로 그린 그림을 올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사실이긴 하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보다는 그냥 놀기 위해서가 더 적절한 이유였다.
무엇무엇 때문에 어떤 것을 하면 '일'이나 '공부'가 된다.
그건 앞서 말했듯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넓고 놀거리는 많아서 백수 체질인 나는 노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도리깨질하는 앞에 서서 고개만 까딱거려도
수월하다는 앞집 임영자 씨 말 듣고
저짝에서 하나 넘기고 이짝에서 하나 제치고
둘이 하면 힘든지도 모르고 잘 넘어간다는
아랫집 맹대열 씨 말 듣고
쌀방아 보리방아 매기미질도
둘이서 셋이서 하면 재미나대서
콩 튀듯 팥 튀듯 바쁜 양승분 씨 밭에 가서
가만히 서 있다
콩 터는 옆에 앉아 껍데기 골라냈다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콩알을 줍기도 했다
심지도 않은 땅콩 한 소쿠리 얻었다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 김해자,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정말이다. 백수도 참 할 일이, 아니 '놀 일'이 많다.
일단은 새로 시작한 어반스케치랑 열심히 놀아볼 생각이다.

* 난생 처음 예습으로 그려본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