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단상

영화 <<아무르>>

장돌뱅이. 2025. 2. 11. 18:01

OTT에서 노인 주제의 영화를 만나면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화면 속 노년의 삶에 몰입하게 된다.

 

죽음에 대하여

구순(九旬)을 맞은 아버지에게 한 아들이 축하의 말을 전했다."아버지 건강하셔서 백수(白壽)를 누리세요."그 아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뭔가 찜찜한 아버지의 기분을 눈치챈 다른 아들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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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다는 것.
늙고 병든다는 것.
그리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

가끔씩 아내와 이런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치매나 간병, 먼저 떠난 사람과 뒤에 남게 될 사람에 대한 '실용적'인 이야기다. 
그마저 막연하게 언저리만 맴돌았을 뿐 깊이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설사 오래 얘기를 나눴다 하더라도 어떤 명확한 결론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날이 현실로 닥치기 전까지는.

노 부부가 있다. 딸은 출가를 해서 두 사람만 산다.
어느 날 식사를 하는 중에 갑자기 아내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뇌졸증의 시작이다.

병원에 입원을 하고 퇴원을 하고 휠체어를 탄다. 아내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자존심을 세운다. 남편에 대한 미안함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때로는 살기 싫다고 말하며 음식을 거부해 보기도 한다. 남편은 화를 내며 억지로 음식을 먹인다. 
그래도 그건 정신이 온전할 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아내의 상태는 점점 나빠진다. 의식과 발음이 불분명해지고 나중엔 고통스런 신음만 반복한다.

딸이 방문하여 말한다.
"이렇게 두면 안 된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
남편은 조용히 말한다.
“나를 비난하지 마라. 난 할 만큼 했다”
사실이다. 자신의 몸도 좋지 않은 늙은 남편은 혼자서 최선을 다했다.

수긍하지 않는 딸에게 묻기도 한다. 
"그럼 니가 엄마를 돌볼래?"
딸은 말문을 닫는다. 남편은 딸에게 맡아달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대안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막대와 가시를 손에 쥐고 휘두르며 막아도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온다고 하지 않던가. '늙어서 생기는 비정상은 다 정상'이라는 말은 아직 멀쩡할 때 하는 흰소리일 뿐 무슨 대책이 있는가.)

치열하면서도 무력하게 시간이 흐르는, 어느 날 아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남편은 갑자기 베개로 아내의 얼굴을 덮어 질식사를 시킨다. 그리고 꽃을 사다가 아내를 치장하고 옷을 갈아입히고 편지를 남긴다. 그 후 남편은 평소처럼 설거지를 끝낸 아내와 외출을 하는 환상을 본다.
아내와 같은 길을 걸어갔음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아무르(Amour)>> 프랑스 말로 사랑이라고 한다.
인간이 지닌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을 영화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2013년에 영화와
비슷한 일이 프랑스에서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86세의 동갑 부부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존엄사'가 불법인 프랑스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유서를 남겼다고 하던가.)

삶의 끝은 죽음이다. 삶이 끝까지 고귀하려면 죽음 또한 그러해야 한다. 
어떤 사회적,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의미를 붙여도 죽음은, 당사자에게 그리고 남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일 뿐이다. 더군다나 아무런 힘도 의식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의  육체에게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고귀한 사명'을 강요하는 것은 설상가상의 폭력이다. 삶이 부단한 선택의 과정이듯 그 '마지막' 폭력에 대해 인간에게 최소한의 선택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오해없기 바란다. 나는 아직 이른바 '존엄사'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논리나 신념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나이가 들면서 가끔씩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긍정과 부정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