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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죽음에 대하여

by 장돌뱅이. 2021. 2. 25.

구순(九旬)을 맞은 아버지에게 한 아들이 축하의 말을 전했다.
"아버지 건강하셔서 백수(白壽)를 누리세요."
그 아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뭔가 찜찜한 아버지의 기분을 눈치챈 다른 아들이 나섰다.
"아버진 건강하시니 백오십 살까지 전혀 문제없으실 겁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펴졌다. 
"암 그래야지. 고연 놈 같으니라고. 나보고 앞으로 겨우 십 년만 더 살라고 하다니······"
친구에게 들은 실화이다. 

오래 살고 싶다는 인류의  오랜 꿈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100세 시대를 넘어 200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마냥 황당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1960년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대) 수명은 56세였다. 2020년에는 무려 83세가 되었다.
식단 개선, 의술 발달,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 등으로 앞으로도 수명은 계속 높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건강 백세'나 그 이상 상수(上壽)의 삶이 인류에게 반드시 축복일까?
아니면 재앙까진 아니더라도 다른 문제는 없는 것일까? 
우선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백년이나 이백년 후면 이백살까지 산다는데
 그러니까 백년이나 이백년 후면

 백이른살이된당신아들과백마흔살이됭당신손자와백스무살이된당신증손자와
백살이된당신고손자와여든살이된당신현손자와

 (두루 둘러봐도 쭈글쭈글한 생들뿐이다)
 (나는 육대 이후의 호칭을 알지 못하니)
 이윽고쉰살이된당신육대손자와서른살이된당신칠대손자와이제갓태어난당신팔대손자가

 오래된 큰 나무가 그렇고

 오래된 큰 구름이 그렇고
 그렇게 오래된 것은 비어 있게 마련이라고,
 당신이 죽어가는 머리맡을 비워둘 텐데

길고 긴 당신 유전자의 진화와 변종의 역사를
오래오래 회억하신 후 당신은 
잇고 잇고 또 잇다보니 뒤끝이 흐리도다
종언하실까 아니면
잊고 잊고 또 잊었으니 죽기에도 가볍도다
유언하실까 그러니까

 백이른살이된당신아들과갓태어난팔대손자사이의
 이 한없이 길고 한없이 지루한 생을
 얼마나 오래오래 완성해야 한단 말인가
 백년도 아니고 이백년 너머까지
-정끝별, 「죽음의 완성」-

파격적인 제목의 일본 소설 『70세 사망법안, 가결』은 고령화 사회에 대한 블랙코미디적
상상이다. '장수생'들로 인해 연금제도와 국민의료보험 등 국가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고,
국가의 생산성 저하와 부채 증가로 젊은 세대가 짊어진 짐은 무거워지는 상황에서
70세가 되면
안락사를 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처방 법안이 가결된 것이다.

소설은 장수 사회의 여파가  55세의 도요코에게 가하는 고통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13년째 며느리에게 병시중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불편함만 앞세우는 시어머니,
가부장적인 남편, 가출하여 집안일은 관심 없는 딸, 일류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삼 년째 은둔형 생활을 이어가는 아들, 
시어머니의 재산 이외에는 친정 일에 관심 없는 시누이들.
세상이 변했다지만 며느리이자 아내이며 어머니인 여성 위치는 개선되지 않았을뿐더러,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해묵은 모순 위에 오히려 새로운 모순이 중첩된 듯하다.

남편이 식탁 위를 쓱 훑어보았다.
다기 세트와 양갱이 놓여 있다.
"2시부터니까 차만 준비했어."
"그런가. 점심은 먹고 오기로 했나."
남자는 참 편하다. 점심을 준비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주부의 부담은 크게 차이 난다.
(······)
"점심을 먹고 온다 해도 그렇지. 양갱만 내놓기는 좀 그렇잖아."
"쌀과자도 사놨어. 멜론도 있고."
"누나가 역 앞에 있는 트롬본의 롤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았나?"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70세에 죽어야 한다는 법이 세상을 요란스럽게 하면서 도요코는 비로소  자신의 지난 삶과
남은 15년을 돌아보게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삶의 동반자라고 믿었던 남편조차 홀연히
친구와 세계 여행을 떠나버렸다. 평생을 일과 가족 부양에 바친 자신은 그런 호사쯤은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평생과 일과 가족 부양에 아내인 도요코는 없어 보였다. 
아무도 자신의 힘들고 허전한 마음에 공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졌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일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고 사소한 일은 더 이상 사소하지 않았다.
마침내 도요코는 여러 번 망설이던 가출을 실행에 옮긴다. 자신에게 남은 삶을 위하여
자신에게 가해지는 유무형의 폭력과 굴레를 과감히 던져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후 소설은  마치 '가출'이 만능열쇠처럼 모든 문제들을 풀어버려 긴장감이 떨어진다.)

70세 ···』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연평균 4.4%(매년 29만 명) 증가했다.
이는 OECD 평균(2.6%)을 약 2%나 상회하는 수치다. 
이대로라면 2048년에는 고령 인구 비율이 37.4%로 인구 셋 중 한 명이 노인이 될 거라고 한다.

하지만 삶의 질을  보장하는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물리적 수명 연장은
무의미할 뿐 더리 나아가 사회적 재앙이 된다. 특히 생의 마지막에 오는 노인의 장기 병간호는
개인의 효와 불효의 문제로만 남겨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연히 국가가 맡아야 한다.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 모두에게 그것은 인간의 존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정끝별의 시에서 보듯 죽음의 '완성(?)'은 죽음뿐이다.
그것은 또한 삶의 완성과 같은 말이다.
하지만 사는 일과 마찬가지로 죽는 일 또한 마음대로 안 된다.
살고 싶다고 살아지지 않는 것처럼 죽고 싶다고 죽어지는 것도 아니고 적절할 때 죽을 수도 없다. 

『YOU DON'T KNOW JACK
』은 알파치노 주연의 텔레비전 영화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해야 할까 한 번쯤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잭(Jack Kevokian,
1928 ∼2011)
이 누구이며 무슨 행동을 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잭은 사람은 죽을 권리를 갖고 있다는 신념을 가진 미국 의사였다.
그는 척추마비로 20년을 누워 지낸 사람이나 루게릭병 환자 등 치료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불치병 환자(130명 이상)의 자발적 죽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 '죽음의 의사(닥터 K)'는 1999년 2급 살인죄로 기소되어 8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생각은 에밀 아자르의『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모모의 푸념과 같아 보인다.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었던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잭의 행위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지지나 비판에 앞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기회로 이 영화를 대하는 것이 더 유익한 태도겠다.
몇몇 국가에서 '존엄사' 혹은 '안락사'는 이미 합법적으로 인정된 상태이다.

36살의 한스는 친구들과 벨기에로 자전거 여행에 나선다.
해마다 친구들 중 한 사람 돌아가며 목적지를 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따라가는 행사이다.
한스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상태다. 벨기에를 선택한 것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물로
이른바 '조력자살'이 허용된 곳이기 때문이다.
한스와 그의 아내는 오랜 투병과 고심 끝에 마지막을 결정한 것이다.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가라앉지만 친구들은 여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그리고 여행 중 재미난 미션을 한 가지씩 수행하는 행사도 거르지 않기로 한다.
누군가는 여장을 하고 클럽에 가보고 누군가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평소에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일을 하면서 친구의 마지막 길을 동행한다.
삶은 늘 그렇게 즐겁고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는 듯이. 

그리고 마침내 도착지에서 아내와 친구들 앞에서 한스는 '저쪽'으로 떠난다.
일 년 뒤 친구들과 한스의 아내는 다시 이곳을 찾아 해변 모래에 큰 글을 새긴다.
"한스 이곳에 다녀가다(HANS WAS HERE)."

『투어드포스 - 기적의 여정』는 독일 영화로 원  제목은 "HIN UND WEG"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대충 '저쪽으로'란 뜻인 것 같다.
죽음은 이곳에서  '저쪽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것이라는 뜻일까?
그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게 하거나
나를 포옹해줄 사람을 보내주기도' 하는 것일까?
안락사는, 존엄사는, 조력자살은 정말 인간의 선택적 권리가 될 수 있을까?


스나다 도모아키는 말기암 판정을 받게 된다.
예상치 못한 죽음(죽음은 늘 그렇게 온다) 앞에 그는 담담히  자신만의 『엔딩노트』를 준비한다.
죽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을 적고 한 가지씩 찬찬히 해나간다.
밀린 숙제처럼 조급해하지 않고 철 지난 옷을 서랍에 넣듯 소소한 일상을  돌아보는 것이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찾아 성당에 가보고, 손주들과 지치도록 놀아도 본다.
가족들과 여행도 가보고 자신의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보기도 한다.

스나다 씨는 몇 년을 더 목숨을 연장할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남은 시간을 가꾸는 일에  골몰한다.
그에게 죽음은 무겁거나 비장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농담을 하기도 한다.

죽음은 죽음 너머가 아니라 그 이전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상실이 아니라  충만한  완결이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엔딩노트』는 스나다 씨의 딸 스나다 마미가 아버지의 마지막 날들을 직접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제작은 내가
좋아하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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