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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11

짜장면은 언제나 옳다 내가 짜장면을 처음 먹어 본 것은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친척 형과 함께 서커스 구경을 한 날이었다. 내가 살던 마을은 행정구역으로는 서울이었지만 변두리 촌이어서 짜장면은 청량리쯤의 시내나 나가야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처음 맛본 짜장면은 가히 천상의 맛이었다. "그 충격적인 첫맛의 기억은 성인이 되면서 점차 희미해지고 소멸되어 차차 여느 보통의 음식과 같이 되었다. 그런데 그 짜장면의 맛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짜장면의 냄새가 성인이 된 내게 강렬하게 부활한 적이 있다. 군에 입대해서 논산훈련소에서 박박 기며 신병 훈련을 받을 때였다. 각개전투 교장에서 돌아오던 저녁 무렵 훈련소 주변에는 늘 짜장 볶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악을 쓰듯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우리들의 눈에.. 2024. 3. 25.
내 손과 발로 할 수 있으면 나이가 드니 가는 모임마다 모임의 주제에 앞서 건강 관련 이야기가 자주 화제에 오른다. 경조사에서 만난 동창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건강 안부를 묻고 나누는 일이 잦다. 혈압과 당뇨, 콜레스테롤은 기본이 된 지 오래이고, 언제부터인가 대화 내용이 더 세부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눈 이야기는 안구건조, 비문증, 백내장에 황반변성까지 이어지고, 뼈 이야기가 나오면 퇴행성 고관절, 슬관절, 척추협착 등으로 다양해진다. 인공치아에 통풍에 대상포진에 전립선에 수면장애에 그냥 매가리가 없다는 하소연까지 증세도 다양하다. 담낭 제거 시술을 받고 '나 이제 쓸개 빠진 놈'이 되었다고 씁쓰레하던 친구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거 없어도 괜찮던데?' 하는 경험에서 나오는 듯한 위로를 던진다. 자신의 문제를 벗.. 2023. 9. 10.
꽃, 밥에 피다 "꽃, 밥에 피다." 인사동에 있는 한식을 내는 식당의 이름이다. 예쁜 식당 이름 대회라도 있으면 상을 받을 것 같다. 친구들과 부부 동반으로 만나 저녁을 먹었다. 미슐랭 가이드에 올랐다는 후광이 있어서인지 저녁 시간 예약을 1시간 반 간격으로 두 파트로 나누어 받았다. (미슐랭? 미쉐린? 어느 게 맞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누군가 타이어를 말할 때 미쉐린으로, 식당을 말한 땐 미슐랭으로 하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세계 곳곳의 도시마다 '미슐랭 별 O개'를 자랑하는 식당들이 있지만 그 기준으로 식당을 선택해 본 적은 없다. 하긴 미슐랭 별3개야 대체적으로 가격도 '후덜덜'한 데다가 예약 자체가 힘들다고 해서 시도의 엄두도 내지 않았지만. 특히 최근 들어서는 낯선 곳의 식당 정보는 손쉽게 '구글신(神.. 2023. 6. 19.
꽃게 시절 게는 별명이 많다. '창자 없는 귀공자'라는 무장공자(無腸公子), '옆으로 걸음질 치는 횡행개사(橫行介士)' 외에도 횡행군자, 강호사자, 내황후, 곽선생 등으로 불리며 옛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 지금은 꽃게, 그중에서도 암꽃게 철이다. 봄철 암꽃게들의 뱃속엔 여름철 산란기를 앞두고 알이 가득 들어 있다. 예전엔 봄이면 서해안에 가서 주꾸미를 먹고 암꽃게를 사 오고, 가을엔 대하를 먹고 숫꽃게를 사 오곤 했지만 이제는 휴대폰으로 클릭 몇 번만 하면 밤 사이에 문 앞에 싱싱한 게 상자가 도착해 있다. 편리는 하지만 재미는 없어진 코로나 시대의 한 풍경이다. 꽃게를 주문해서 세 가지 음식, 양념게장과 꽃게탕과 간장게장을 만들었다. 양념게장과 꽃게탕은 내가 만들었고 간장게장은 아내가 담궜다. (* 이전 글 참.. 2022. 4. 24.
내가 읽은 쉬운 시 168 - 안도현의「봄똥」 2월의 제철 식재료는 단연 '봄똥'이다. 봄동이 맞춤법에 맞지만 왠지 '봄똥'이라고 해야 더 어울려 보인다. 자장면이 아니고 짜장면이라고 해야 그렇듯이······ 마트에 가면 좋은 가격으로 가판대에 가득 놓여있다. '봄똥'은 겨울을 노지에서 보내느라 속이 들지 않고 잎이 옆으로 납작하게 퍼져 있다. 양팔을 벌리 듯 잎을 활짝 펴고 추위를 한껏 받아냈을 짙푸른 잎에서는 싱싱한 야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비타민C에 베타카로틴에 칼륨과 칼슘과 인이라는 발음도 어려운 성분이 풍부하다고 영양 학자들은 설명하지만 노란 중심부가 드러난 봄똥은 식재료에 앞서 그대로 꽃이다. 예쁘고도 맛있는 꽃이다. 찬물로 씻다가 한 조각을 아무런 양념 없이 씹어도 아삭거리는 식감 뒤에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이어진다. 봄똥으로 겉절이를 .. 2020. 2. 22.
내가 읽은 쉬운 시 136 - 안도현의「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시를 흉내내 새로운 계절을 위한 소망과 다짐을 붙여 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오래된 습관이라 해도 큰 성취를 갈구하지 않는 소소한 다짐만으로, 아니 다짐의 상상만으로도 한낮 지하철 안처럼 무료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잠시 유쾌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적막의 포로'가 되어 가끔씩 소란스러운 세상과 거리를 두어보자. 그러면 '술 한잔 사주지 않는 인생'에 너그러워질 수도 있으리라. 아무 이유 없이 아내와 자주, 오래, 많이 걷자. 같이 읽은 책에 대해 한가히.. 2019. 9. 3.
내가 읽은 쉬운 시 132 - 안도현의「물외냉국」 어릴 적 오이를 잘라 가운데 부드러운 부분을 손가락으로 파내고 잔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물을 담아 어른들이 술을 마실 때 내는 "카아!" 소리를 흉내내며 친구와 여러번 대작을(?) 하다가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았다. 애초 술을 상상하기보다 물에서 나는 향긋한 오이 냄새가 좋아서 한 짓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오이냉국. 펌프 물인데도 그릇에 이슬이 맺힐 정도로 시원했다. 막걸리 식초를 넣어 새콤해진 맛도 잠시 더운 여름을 쫓는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오이가 아삭하게 씹힐 때마다 입과 코에 퍼지는 은은한 향기가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딸아이는 바로 그 향기 때문에 오이를 싫어한다. 좋아하는 이유와 싫어하는 이유가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정확히 들어맞는다. 아쉽지만 그래서 오이냉국은 딸아이와.. 2019. 8. 8.
내가 읽은 쉬운 시 129 - 안도현의「건진국수」 *위 사진 : "봉화묵집"의 건진국수 *위 사진 : "안동국시"의 건진국수 이십여 년 전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안동 여행을 갔다가 건진국수를 처음 먹었다. 건진국시는 이름대로 칼국수처럼 얇은 국수가락을 만들어서 삶은 다음, 찬물에 헹궈 건져내고 미리 만들어 식힌 육수에 말아내는 안동 지방의 전통 음식이다. 아내는 그다지 특별하게 기억에 남을 만큼의 맛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나는 더운 여름에 시원한 육수에 잠긴 칼국수처럼 썬 수제 국수발의 맛이 인상적이었다. 입안에서 툭툭 끊어지는 특이한 식감은 국수 반죽에 콩가루를 넣어서라고 했다. 그런데 그 여행 이후로 건진국수를 먹을 기회가 없었다. 안동여행도 여러번 갔지만 더 이상 건진국수를 파는 곳을 만나기 힘들었다. 일반 칼국수에 비해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일 것.. 2019. 8. 1.
내가 읽은 쉬운 시 127 - 안도현의「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 *사진 출처 : SBS 「녹두꽃」 홈페이지 텔레비젼 연속극 「녹두꽃」이 끝났다. 살아있는 캐릭터와 짜임새 있는 스토리가 지난 몇 달 동안의 주말 저녁을 즐겁게 했다. 고부 왈패였다가 동학군의 별동대장으로 변신한 가공 인물 백이강을 연기한 조정석의 매력이 단연 압권이었다. 거기에 전봉준이라는 묵직한 역사적 실재 인물을 맡은 최무성과 고부 군아의 이방이며 백이강의 아버지 백가(박혁권), 전주 여각의 행수 최덕기(김상호), 황진사 황석주(최원영) 등도 모두 현실감 있게 창조된 인물이었고 연기였다. 무엇보다 가슴을 뜨겁게 했던 건 '녹두꽃'으로 상징되는 그 시대의 전사들이었다. 구한말이라는 격변의 시대, 외세의 침탈과 무능한 권력의 폭정으로부터 백성을 구하고 동학으로 인즉천(人卽天)이라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 2019. 7.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