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32 - 안도현의「물외냉국」

by 장돌뱅이. 2019. 8. 8.




어릴 적 오이를 잘라 가운데 부드러운 부분을 손가락으로 파내고 잔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물을 담아 어른들이 술을 마실 때 내는 "카아!" 소리를 흉내내며
친구와 여러번 대작을(?) 하다가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았다.
애초 술을 상상하기보다 물에서 나는 향긋한 오이 냄새가 좋아서 한 짓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오이냉국.
펌프 물인데도 그릇에 이슬이 맺힐 정도로 시원했다.
막걸리 식초를 넣어 새콤해진 맛도 잠시 더운 여름을 쫓는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오이가 아삭하게 씹힐 때마다 입과 코에 퍼지는 은은한 향기가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딸아이는 바로 그 향기 때문에 오이를 싫어한다. 
좋아하는 이유와 싫어하는 이유가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정확히 들어맞는다.
아쉽지만 그래서 오이냉국은 딸아이와 함께 할 수 없는 유일한 음식이 되었다.
물론 오이소박이나 오이지도 그렇다.
손자친구는 나와의 친밀도를 이용해서 오이를 좋아하도록 만들어봐야겠다.
"아니야. 오이 향기가 좋단 말야!"라고 제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게 해야겠다.


외가에서는 오이를
물외라 불렀다
금방 펌프질한 물을
양동이 속에 퍼부어주면 물외는
좋아서 저희들끼리 물 위에 올라앉아
새끼오리처럼 동동거렸다
그때 물외의 팔뚝에
소름이 오슬오슬 돋는 것을
나는 오래 들여다보았다
물외는 펌프 주둥이로 빠져나오는
통통한 물줄기를 잘라서
양동이에 띄워놓은 것 같았다
물줄기의 둥근 도막을
반으로 뚝 꺾어 젊은 외삼촌이
우적우적 씹어 먹는 동안
도닥도닥 외할머니는 저무는
부엌에서 물외채를 쳤다
햇살이 싸리울 그림자를
마당에 펼치고 있었고
물외냉국 냄새가
평상까지 올라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