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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8

동지 무렵 혹한이 와서 오늘은 큰 산도 앓는 소리를 냅니다 털모자를 쓰고 눈 덮인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피난하듯 내려오는 고라니 한 마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고라니의 순정한 눈빛과 내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추운 한 생명이 추운 한 생명을 서로 가만히 고요한 쪽으로 놓아주었습니다 - 문태준, 「눈길」- 춥다. 그래도 '서로 가만히 고요한 쪽으로' 가다 보면 늘 따뜻한 일은 있다. 동짓날. 동지가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 중동지와 노동지에는 팥죽을 쑤지만, 애동지에는 팥죽을 먹으면 아이들에게 탈이 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에 팥떡을 먹는다. 올해는 애동지다. 손자저하들 생각에 팥떡을 사다 먹었다. 손자2호가 영상 전화를 주었다. 어린이집에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2023. 12. 22.
가을비 내려 좋은 날 입동을 앞두고 한 이틀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서도 햇빛이 났다가 어두워졌다가 일기의 변화가 무쌍했다. 마치 여름 같던 이상고온의 가을를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서둘러 털어내려는 것 같았다. 늦가을비가 종일 오락가락한다 잔걱정하듯 내리는 비 씨앗이 한톨씩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문태준, 「늦가을비」- 이번 비는 잔걱정 하듯 가만가만 내리지 않고 위 그림 속처럼 요란을 떨며 내렸다. 바람도 창문을 흔들며 세차게 불었다. "집에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날씨야." 나의 말에 아내가 말했다. "장돌뱅이한테 안 좋은 날씨가 있나?" 이런 날은 으레 전(煎)을 부쳐먹고 싶은 지수(指數)가 높아진다. 달궈진 후라이판 위에 반죽을 놓을 때 차르르 하는 소리부터가 맑은 날과는 다르게 차분하다. 노릇하고 바삭하게 익은 전으.. 2023. 11. 7.
아주 잠시라도 노노스쿨에서 주변 마을의 어르신을 위한 도시락 만드는 날. 내가 속한 조가 맡은 일은 새우마늘종볶음이었다. 새우을 볶고 마늘종을 데치고 양념을 만들어 함께 졸여내면 되는 간단한 음식이었다. 다른 두 조는 오미자소스돼지갈비찜과 무생채를 만들었다. 하루종일 날이 궂었지만 시간차의 행운으로 음식 배달에 큰 문제는 없었다. 우리가 만들어 건네는 작은 도시락 하나. 뚜껑을 여는 순간만이라도 창을 흔드는 비바람을 잊을 수 있으시기를. 가난한 식구 밥 해 먹는 솥에 빈 솥에 아무도 없는 대낮에 큰 어머니가 빈 솥 한복판에 가만하게 내려놓고 간 한 대접의 밥 - 문태준, 「낮달을 볼 때마다」- 2023. 4. 11.
봄비가 온 뒤 어제는 모처럼 손자들과 함께 하는 일요일이라 밖에서 보낼까 했는데 비가 내렸다. 집안에 갇혀 이런저런 놀이를 하며 하다가 비가 설핏해졌을 때 손자와 축구공을 들고 아파트 단지 내 축구장으로 나갔다. 손자와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의 공놀이 시중을 들어주며 뛰어다니니 비와 땀이 섞인 물기로 몸이 촉촉해져 왔다. 오늘 아침 하늘은 시치미를 떼 듯 구름이 감쪽같이 다 사라지고 없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 아내는 등교길 손자에게 한 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 입혔다. 손자는 두꺼운 옷이 버겁다고 왼고개를 치다가 마지못해 입고 갔다. 봄비 온다 공손한 말씨의 봄비 온다 먼 산등성이에 상수리나무 잎새에 송홧가루 날려 내리듯 봄비 온다 네 마음에 맴도는 봄비 온다 머윗잎에 마늘밭에 일하고 돌아오는 소의 곧은 등 위에 봄.. 2023. 3. 13.
병실에서 12 가을 수도사들의 붉고 고운 입술 사과를 보고 있으니 퇴원하고 싶다 문득 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싶다 상한 정신을 환자복과 함께 하얀 침대 위에 곱게 개켜놓고서 - 문태준, 「사과밭에서」- 식사 준비하러 집에 다녀오다 올려본 하늘. 어쩌자고 저렇게 파란지······ 정말이지 가을철 "내 나라 하늘은 곱기가 지랄이다". 혼탁한 세상에선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우선 아내와 이 병실에서만큼은 퇴원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환자복만 곱개 개켜놓겠는가. 병실 바닥, 아니 병실 전체 '미시나우시'도 기꺼이 해주겠다. 2022. 8. 28.
돌아갈 수 없는 풍경 손자친구가 어린이날 받은 선물을 자랑했다. 포켓몬스터 카드와 인형과 풍선을 차례대로 보여주며 신이 나서 설명을 했다. 동생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자신이 없어지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오래전 딸아이가 어렸을 적 아내와 내게 하던 재롱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고 반복되는 모습에 새삼 세월을 느껴본다. 어미 개가 다섯 마리의 강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강아지들 몸이 제법 굵다 젖이 마를 때이다 그러나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마른 젖을 물리고 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정을 뗄 때가 되었다 저 풍경 바깥으로 나오면 저 풍경 속으로는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 문태준, 「젖 물리는 개」- 같은 다리를 두 번 지나는 강물이 없듯, 한 번 '밖으로 나오면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 2022. 5. 6.
서산·태안 돌아오기 1 여행 전날 충남 지방에 눈과 함께 추위 소식이 있었다. 너무 많은 눈이 내리지 않았기를, 너무 춥지 않기를 바라며 출발을 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벗어나 개심사를 가다 보면 길 옆으로 옛 삼화목장을 지나게 된다. "1969년에 김종필 씨가 드넓은 산지를 목초지로 '개발'하겠다고 조선시대에 12진산(鎭山)의 하나였던 상왕산의 울창했던 숲을 모두 베어내고 외제 풀씨를 뿌려 심은 것이다."(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정치권력의 과잉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한때 이곳을 '김종필 목장'이라고 불렀다. 나무 한 그루 없이 굽이치는 넓은 언덕은 우리나라에선 확실히 보기 드문 풍경이다. 간밤에 내린 눈은 빛바랜 초지 여기저기에 희끗희끗 쌓여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를 세우고 문을 열자.. 2022. 1. 17.
내가 읽은 쉬운 시 144 - 문태준의「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 - 문태준의 시「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 비가 잦은 가을이다. 더불어 날씨도 쌀쌀해졌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하루이틀 사이에 눈에 띄게 두터워졌다. 비가 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을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며 반복해서 읽었다. 여름이 배경인 시 같지만 가을 분위기도 난다.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고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가자. 2019. 1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