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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6

겨울나무 산책을 하며 헐벗은 겨울나무가 눈에 들어올 때면 동요 를 부르곤 했다. 아니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떠올리며 세상의 모든 겨울나무는 '세한도 속의 소나무'거나, 백석의 시에 나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HTML 삽입 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 언덕 위에 줄 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말없이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2024. 2. 13.
병원 졸업 "이제 병원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뼈는 완벽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을 하시면서 손상된 근육을 다시 키우세요." 의사가 말했다. 백여 일만에 아내의 허리 문제가 병원에서 졸업 또는 독립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외래 일정도 없어졌고 주사도 없어졌다.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합격 통지서를 받은 수험생처럼 의기양양하게 병원문을 나섰다. 나는 힘든 시간을 견뎌낸 기특한 아내에게 맛난 저녁을 내겠다고 하고, 아내도 그동안 고생했다며 나에게 그러겠다고 했다. 우선은 예전에는 자주 갔지만 지난여름 이후로 가보지 못했던 공원을 오래 걸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춥지 않았다. 혹한의 겨울을 견디는 나무들이 의젓해 보였다.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 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 2022. 12. 7.
내가 읽은 쉬운 시 157 - 도종환의「처음 가는 길」 새해에는 새로운 음식으로! 아내에게 건넨 나의 새해약속이다. 물론 지난 해에도 노노스쿨이나 기타 책을 보며 새로운 음식들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 익숙한 음식들을 자주 반복한 것도 사실이다. 아내는 그거로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새해에는 집에 있는 조리책을 보며 이제까지 만들지 않은 음식들을 중점적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아내의 검증을 통과한 음식은 딸아이 부부를 초대했을 때 상에 오르게 될 것이다. 연말연시 동안 만든 아래 사진 속 음식의 대부분은 나로서는 처음 만들어본 것들이다. 같은 된장찌개나 파전이라고 해도 이제까지 만든 것과는 조금 다른 재료의 조합이나 방식으로 만들었다. 아직도 '처음인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은 설렘이고 즐거움이다. 따지고 보면 다가오는 모든 시간이 내겐.. 2020. 1. 4.
내가 읽은 쉬운 시 148 - 도종환의 「길」 햇살 가득한 아침 후미진 골목길에서 마주친 나팔꽃. 가파른 담장을 끌어안고 영롱한 빛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살풋한 바람에도 온몸 흔들리며 이룩한 나팔꽃의 아침이 눈부셨다. 살가운 위로와 격려, 속 깊은 삶의 잠언 같은 것이 잠시 서성이는 내 시선을 거슬러 가만히, 그러나 당당히 전해져 왔다. 저 나팔꽃과 어울리려면 나는 어떤 목소리로 살아야 할까?'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2019. 10. 18.
내가 읽은 쉬운 시 42 - 도종환의「책꽂이를 치우며」 미국 주재를 마치고 돌아와 집 정리를 하면서 책이 걸렸다. 책은 젊은 시절부터 나를 비춰본 거울이고 살아온 흔적이기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수집이고 집착이고 욕심의 증거 같아 부담스러워지던 까닭이었다. 만나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필요한 곳을 찾아 기증을 하였다. 과감히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리기도 하였다.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으면서도 막상 책을 떠나 보낼 땐 미련이 남아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드러나는 벽면과 여유로워지는 책장을 보며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드러내야할 벽면은 넓고 이별을 해야할 책들은 많다. 당분간 새책 사는 걸 더디게 하고 감명 깊었던 옛책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미래는 과거에서 오듯 삶의 지혜는 새책과 옛책에서 동일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 2016. 2. 21.
꽃은 다시 핀다 아내와 국토를 여행할 적에 찍은 꽃 사진 몇 장. 시인은 "꽃은 다시 핀다"고 했다. 어디 꽃뿐이랴. 우리가 사는 이 너절한 세상에 아직 꽃을 닮은 사람들이 있어 그래도 견딜만하다.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돌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변치 않고 아름답게 있는 것은 없다 영원히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없다 나무도 풀 한포기도 사람도 그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바다까지 갔다가 제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제 목숨 다 던져 수천의 알을 낳고 조.. 2014.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