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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11

'글로벌'한 인연 미국 생활을 할 때, 아내와 나를 천주교로 이끌어주신 수녀님과 이웃이자 교우.그 이후 아내와 나는 한국으로, 수녀님께선 동남아를 거쳐 귀국을 하셨고, 패트릭 님과 카타리나 님은 폴란드로 옮겨 지금도 살고 있다.연말을 맞아 패트릭 님에 앞서 카타리나 님이 귀국하여 함께 식사와 커피를 했다.거리는 소란스런 시절이지만 잠시 지난날과 지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글로벌'시대다운 인연이네요."수녀님이 말씀하셨다.이제부터 세상은  수녀님께서 직접 내려준 커피를 마셔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그렇게 두 종류가 있다고 나는 주장했다.^^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풀씨 하나로 만나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아름답던 시절은 짧고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나 또한 너 .. 2024. 12. 14.
관악산 코로나가 지나 간 이후 여행은 물론 산행에도 '오래간만'이라는 말을 붙이게 된다.관악산도 그렇다. 가장 최근에 언제 올랐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아내도 체력이 괜찮을 때는 함께 올랐던 적도 있었는데······.이제 아내는 높낮이의 변화가 없는 평지를 오래 걷거나 산자락에 붙은 무장애 길을 걷는다.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은 아내와 함께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날이다. 등산이 그중 하나다. 북한산 숨은벽과 관악산을 두고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 아내가 친구와 만나는 장소에서 가까운 관악산을 오르기로 했다. 지하철 신림선 관악산역에서 나오면 바로 관악산 들머리다. 신림선은 2022년 5월에 개통된 따끈따끈한(?) 경전철이다. 여의도 샛강역에서 관악산역까지 11개 역을 운행한다.'관악산공원'이란 현판을 단.. 2024. 11. 17.
다시 가을 긴 추석 연휴가 지났다. 소심한 나로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죽어도(?) 아프지만 말아야 할 시간 같았다.*만평 출처 : 경기일보 유동수 화백 만평, 전북일보 정윤성의 기린대로418,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누군가는 아프다고 말하거나 피가 나는 것쯤은 조금 아픈 것이라는 증세 위로 진단을 내려주고, 의식이 없을 때만 응급실에 오라는 자상한 안내와 함께 연휴 중에 오면 환자 부담금이 크다는 가정경제를 위한 팁도 알려주고, 또 누군가는 의료공백으로 치료에 문제가 생기면 비행기로 해외로 실어나가겠다는, 스펙터클한 의료 세계화의 포부도 역설했지만.질긴 여름 더위는 이제 정말 막바지라 며칠 내로 선선해진다고 한다.새로운 계절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다.'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서로 그렇게 물어보자.좋은 꿈.. 2024. 9. 19.
어린이 '꽃' 이른 봄에 핀한 송이 꽃은하나의 물음표다당신도 이렇게피어 있느냐고 묻는-도종환, 「한 송이 꽃」-손자 친구들은 내게 '꽃'이다.한 송이 '꽃'이고 동시에 무수하게 피어나는 '꽃'이다. 매 순간마다 물음표이자 느낌표다. 2024. 5. 5.
···살았으므로 ···없었으므로 그는 밀림의 제왕이다그러나 차지한 영역은 있으나 영토는 없고먹잇감은 있으나백성도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도 없는 왕이다그는 숲의 강자이다그러나 그를 경계하는 무리는 많아도우러러보는 짐승은 없다우기가 찾아오면 사슴도 원숭이도 숲을 떠나는데그는 영역을 지키느라 서너 달씩 굶주리곤 한다굶주려도 풀을 뜯거나 나뭇잎의 초록을 씹지 않는 게 왕의 자존심그러나 제 영역을 침범한 사나운 놈과 싸워 지기라도 하면바로 꼬리를 내리고 초라한 뒷걸음으로 물러나야 한다어떤 때는 열다섯번에 한번쯤 사냥에 성공할 때도 있고먹다버린 썩은 고기를 핥아야 하는 날도 있다맹수라고 하지만코뿔소나 버펄로와 정면에서 겨루어본 적 드물고전열을 흐트러뜨린 뒤 길 잃은 어린것의 목을 물어뜯는 것이제왕의 일반적인 사냥법이다가치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고진.. 2024. 5. 2.
겨울나무 산책을 하며 헐벗은 겨울나무가 눈에 들어올 때면 동요 를 부르곤 했다.아니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떠올리며 세상의 모든 겨울나무는 '세한도 속의 소나무'거나, 백석의 시에 나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언덕 위에 줄 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나무 뒤에서 말없이나무들을 말없이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넉넉한 허공 때문이다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 도종환, 「여백」-이.. 2024. 2. 13.
병원 졸업 "이제 병원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뼈는 완벽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을 하시면서 손상된 근육을 다시 키우세요." 의사가 말했다. 백여 일만에 아내의 허리 문제가 병원에서 졸업 또는 독립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외래 일정도 없어졌고 주사도 없어졌다.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합격 통지서를 받은 수험생처럼 의기양양하게 병원문을 나섰다. 나는 힘든 시간을 견뎌낸 기특한 아내에게 맛난 저녁을 내겠다고 하고, 아내도 그동안 고생했다며 나에게 그러겠다고 했다. 우선은 예전에는 자주 갔지만 지난여름 이후로 가보지 못했던 공원을 오래 걸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춥지 않았다. 혹한의 겨울을 견디는 나무들이 의젓해 보였다.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 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 2022. 12. 7.
내가 읽은 쉬운 시 157 - 도종환의「처음 가는 길」 새해에는 새로운 음식으로! 아내에게 건넨 나의 새해약속이다. 물론 지난 해에도 노노스쿨이나 기타 책을 보며 새로운 음식들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 익숙한 음식들을 자주 반복한 것도 사실이다. 아내는 그거로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새해에는 집에 있는 조리책을 보며 이제까지 만들지 않은 음식들을 중점적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아내의 검증을 통과한 음식은 딸아이 부부를 초대했을 때 상에 오르게 될 것이다. 연말연시 동안 만든 아래 사진 속 음식의 대부분은 나로서는 처음 만들어본 것들이다. 같은 된장찌개나 파전이라고 해도 이제까지 만든 것과는 조금 다른 재료의 조합이나 방식으로 만들었다. 아직도 '처음인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은 설렘이고 즐거움이다. 따지고 보면 다가오는 모든 시간이 내겐.. 2020. 1. 4.
내가 읽은 쉬운 시 148 - 도종환의 「길」 햇살 가득한 아침 후미진 골목길에서 마주친 나팔꽃. 가파른 담장을 끌어안고 영롱한 빛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살풋한 바람에도 온몸 흔들리며 이룩한 나팔꽃의 아침이 눈부셨다. 살가운 위로와 격려, 속 깊은 삶의 잠언 같은 것이 잠시 서성이는 내 시선을 거슬러 가만히, 그러나 당당히 전해져 왔다. 저 나팔꽃과 어울리려면 나는 어떤 목소리로 살아야 할까?'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2019.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