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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48 - 도종환의 「길」

by 장돌뱅이. 2019. 10. 18.



햇살 가득한 아침
후미진 골목길에서 
마주친 나팔꽃.
가파른 담장을 끌어안고 영롱한 빛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살풋한 바람에도 온몸 흔들리며 이룩한 나팔꽃의 아침이 눈부셨다.
살가운 위로와 격려, 속 깊은 삶의 잠언 같은 것이
잠시 서성이는 내 시선을 거슬러 가만히, 그러나 당당히 전해져 왔다. 

저 나팔꽃과 어울리려면 나는 어떤 목소리로 살아야 할까?'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 솔바람 소리
돌들과 부대끼며 왁자하게 떠드는 여울물 소리
그런 소리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음성도
세상을 호령할 명령문 한 줄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가식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며
네게 이르렀다

낮은 곳에는 낮은 곳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다
네 옆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

- 도종환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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