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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푸드 스타일링 속 '니부고리'

by 장돌뱅이. 2019. 10. 24.

"야, 공구실 가서 '니부고리' 가져와!"
트럭 엔진 덮개를 열고 수리를 하던 고참병이 내게 뜬금없는 지시를 내렸다.
"???… '니부고리'가… 뭡니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되묻자 그가 들고 있던 쇠공구를 내게 던졌다.
"대학 다니다 온 새끼가 '니부고리'도 몰라? 눈썹이 휘날리도록 빨리 안 달려가?"
입대를 하여 짧은 차량수리 교육을 받고 막 자대에 배치받은 참이었다.
니부고리에 대학을 갖다 붙인 그의 말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무작정 공구실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운은 공구실에서도 이어졌다.
공구실 담당이 하필이면 '떨어진 낙엽도 조심해서 밟는다'는 말년 병장이었다.
니부고리를 찾으면 담당이 알아서 내줄 걸로 기대했지만 그는 자리에 앉아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니가 꺼내 가."  
난감함이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차피 모르는 건 빨리 고백하고 '푸닥거리'를 치르는 게 수였다.
잠시 공구들을 뒤적거리는 척을 하는 '성의'를 보이고는 이실직고를 했다.
"니부고리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 자식 그거 사람 귀찮게 하네. 그 자리에 머리 박아! 얌마 차량수리병이 니부고리도 몰라?"
그는 나를 원산폭격 시키고 공구와는 상관없는 군대 생활 요령에 대해 일장 훈계를 늘어놓은 다음 천천히 일어나 
내 머리맡에 간단한 스패너 하나를 툭 던지듯 내려놨다. 끝단에 '5/16'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공구를 들고 다시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갔지만 고참병은 '까짓 니부고리 하나 가져오는데
날 새겠다'며 눈을 부라렸다.

일본어인 니부고리(にぶごり 里)는 차량수리 교육 시간에 배운 '표준 용어'대로 하면 '5/16인치 양구렌치' 였다.
'표준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군대에 와서 처음 차량 수리를  배운 나같은 사람들이었고
사회에서 차량수리 경험이 있는 이른바 '사회 주특기'들은 누구도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나 역시  '짬밥'이 쌓이면서 '16분의5 인치 양구렌치' 보다는 점차 니부고리에 익숙하게 되었다.

차량수리병들 사이에서는 정체 불명의 다른 말들도 통용되었다.
배전기(디스트리뷰터)는 '뷰다'로, 변속기통(트랜스퍼케이스)은 '화케이스' 등으로 불렀다.
앰블런스 차량의 약자 AMB 대신 'MV'로 쓰며 당당해 하던 선임하사도 있었다.
우리말과 영어, 그리고 일본어가 그때그때 마구 변용·차용·혼용되었다.

어디 오래 전 군대뿐인가. 지금도 일본어나 일본식 영어는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무수히 많다.

가라
(가짜, ), 가부시키(가부시끼 : 나눠내기, 추렴), 가쿠목(가꾸목 : 각목), 겐세이(견제), 겐토(겐또 : 어림짐작), 고바이(비탈),
고뿌(), 고수부지(둔치), 곤로(화로), 곤색(감색), 공구리(콘크리트), 구사리(쿠사리 : 면박), 구치판치(구찌빤찌: 입심), 기마에(기마이 :
선심), 기즈(기스 : ), 기지 (옷감 원단), 나라비(나래비 : 줄서기), 나라시(고루펴기), 니꾸사꾸(배낭), 다라이(큰대야), 다마(구슬, 전구),
다마네기(양파), 다시(맛국물), 단도리(단속), 닭도리탕(닭볶음탕), 데모토(데모도 : 보조공), 덴푸라(뎀뿌라 : 튀김), 뎃기리(틀림없이),
뎃빵(우두머리), 도란스(변압기), 도키다시(광택이나 무늬를 내다), 뗑깡(생떼), 라이방(색안경), 라지에타(라디에이터), 마호병(보온병).
마후라(머플러), 만땅(가득(채움)), 무뎃뽀(막무가내), 바케쓰(바께쓰 : 양동이), 벤또(도시락), 브라자(브래지어), 비까번쩍(번쩍번쩍),
빠꾸(뒤로), 뼁끼(페인트), 사라(접시), 사라다(샐러드), 소데나시(민소매), 스끼다시(곁들인 안주), 스덴(스텡 : 스테인리스), 시다바리
(조수), 시마이(끝냄), 쓰레빠(슬리퍼), 아나고(붕장어), 앗사리(시원시원한 사람), 엔꼬(엥꼬 : 바닥남), 오봉(쟁반), 오사마리(끝맺음),
오야붕(우두머리), 와리바시(나무젓가락), 와사비(고추냉이), 잇파이(입빠이 : 가득), 하야까시(희롱), 하코방(하꼬방 : 판잣집),
후라이(부침, 거짓말), 히야시(시야시 : 차게 함), 등등.



최근에 생소한 푸드 스타일링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우리 사회에 푸드 스타일링이란 분야가 소개된 게 
최근일 것인데
이곳에도 이미 많은 '니부고리'들이 자리를 잡은 듯 보였다.

강사는 푸드 스타일링이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간지(느낌), 도비라(속 표제), 뻬다(배경), 누끼(사진따기), 속컷, 풀컷, 대꼭지, 속꼭지, 품(요리갯수) 등등.


개별 단어뿐만 아니다. 외국어의 문법과 어법도 직수입 되어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거기에 생경한 번역투의 말도 흔하다. 그렇게 우리 말을 오염시킨 건 아무래도 배운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언젠가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쓰기』란 책의 내용으로 나의 글을 한번 체크해보니 고쳐야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잡문이지만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다.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용불용설은
유전학이 아니라 언어에 적용하면 정확하게 들어맞는 법칙이겠다. 

일본제국은 이 땅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우리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문화와 전통까지도 강요했다.
또 어떤 것은 강요하지 않아도 일본말 일본글을 통해 지식을 얻고 생각을 이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의 문화를
아무 비판도 없이 그대로 우리의 것으로 번역해 제 것인양 그 속에서 살고, 다시 이것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물려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버리지 못하고 쓰고 있는 수많은 일본말은 이래서 버젓하게 사전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우리 겨레의 말과 글은 남의 땅에서 들어온 중국글자말과 일본말과 서양말에 시달려 '삼중고'의 병신으로 앓고 있다.
우리 말글이 앓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 백성들이 앓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말을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우리 백성들을 어떻게 살리나 하는 문제가 된다. 나는 여기서 더구나 지식인들의 커다란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말을 살린다는 것은 바로 우리 말을 백성의 말로 한다는 것이고, 우리 말을 백성의 말로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백성의 사회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오덕, 『우리글 바로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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