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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50 - 조향미의「내가 천천히 음미하며 걸을 수 있는 것은」

by 장돌뱅이. 2019. 11. 4.



가을이 깊다.
어느 나무는 단풍이 들고 어느 나무는 여전히 푸른 잎을 달고 있다. 
같은 종류의 나무도 서있는 위치에 따라 단풍든 정도가 다르고 같은 나무도 가지와 줄기에 따라 또 다르다.
결국 그래도 가을은 가을이다.
그렇게 크고 단순하게 보고 살고 싶다.
 



아내와 강을 따라 걸었다.
가볍게 시작한 걸음이 일년 전 이 맘 때까지 존재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아내가 떠올리면서 잠시 무거워졌다.
소설가 김훈은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고 했지만 쉽지 않다.
명쾌하게 선을 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삶은 무거움과 가벼움을 무시로 오간다.
 



해가 지고 강 건너 건물들의 불빛이 또렷해질 때까지 걸었다.
평소 보다 긴 걸음이 아내에게 도움이 되길 바랬다. 
도서관에서 아내와 책을 빌려 돌아왔다.


↑광진정보도서관의 벽화.


내가 하늘보다 땅에 더 감동 받으며

이렇게 천천히 한 발 한 발
음미하며 걸을 수 있는 것은
땅이 나를 끌어당기며 놓지 않기 때문이지
아까부터 내 몸의 무게를 느끼며
어디 좀 쉴 자리를 찾는 것도
나의 모체 지구의 과분한 사랑에
약간 엄살을 부리는 거야
어쩌면 나는 둥둥 떠다닐 수도
훨훨 날아다닐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허무하고 막막했을 것야
뿌리나 발을 가지고 내려앉고 싶었을 거야
낮게 누워 사랑하고 싶었을 거야

내 마음 언제나 나무처럼 어디에 붙밭여 있는 것도
그러다 또 야생동물처럼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것도
한 줌 흙으로도 풀 한 포기 키우고 벌레 한 마리 잠재우는
우리 별의 살가운 사랑 때문이지
또한 그 별의 한 조각인 내 출렁이는 열망 때문이지
수십억 년 전 별과 내가 한 개 세포였을 적부터
한 점 빛이었을 때부터

-조향미의 시, 내가 천천히 음미하며 걸을 수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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