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262

비오는 주말 토요일 오전, 한강 산책을 갔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 떨어지는가 싶던 빗방울은 금세 굵어졌다. 한강 변에는 비 피할 곳이 다리 밑뿐이라 중간 지점에서는 무방비로 젖을 수밖에 없다. 서둘러 뒤돌아 오다가 마주오고 있는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준비 해 온 우산을 내밀었다. 산책 전 우산을 챙기라는 아내에게 너무 걱정이 많은 거 아니냐며 코웃음을 쳤던 나는 겸연쩍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조강지처 말은 무조건 들어야 돼!" 한번 시작한 비는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내렸다. 오래 내리는 비는 입을 궁금하게 한다. 아내가 좋아하는 전을 만들기 위해 냉장고를 뒤졌다. 요즈음 말로는 이런 걸 '냉파(냉장고 파먹기)'라고 한다던가. 진미채와 감자가 적당해 보였다. 감자채는 몇 번 해먹은 적이.. 2021. 5. 16.
우리는 누구인가 위 그림은 게오르게 그로스가 1926년에 제작한 「사회의 기둥들」이다. 그림은 부패한 사회 지배 세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조롱을 담고 있다. '사회의 기둥들'로 힘을 가진 정치가와 군인, 언론과 성직자들은 진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귀가 없거나 눈이 막혀 있고, 있어도 외면하고 있다. 그들의 열린 머릿속에는 쓰레기와 배설물이 가득하다. 평화의 상징이라는 종려나무 잎에는 피가 묻어 있다. 요 며칠 사이 일터에서 사망한 노동자들 뉴스가 연이어 보도되었다. 뉴스는 평소에 없던 비극이 갑작스레 최근에만 특별히 일어난 것인 양 흥분했다. 하지만 "다녀 오겠습니다" 라는 경쾌한 아침 인사를 비감한 유언으로 남기며 노동자들이 터무니없는 생의 정거장으로 내몰리게 된 건 이미 오래 전부터다. 2020년 산재 사고 .. 2021. 5. 15.
빗소리 들리는 저녁 아내와 술을 나누며 두 해 전 이맘때쯤 먼길을 떠난 겨레붙이를 이야기했다. 그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며 해맑고 즐거웠던 순간의 사진과 기억들을 아프게 들춰보았다. 헤어짐과 상실에 절망하고 허전해하다 결국 받아들이며 삶이 지속되는 것이겠지만, 남에게는 어깨를 토닥이며 해줄 수 있는 그 말이 당사자인 우리에게도 유효한 위로가 되기에는 2년의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내년에는 우리도, 먼곳의 그도 더 편안해지기를.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박형준, 「빗소리」- 2021. 5. 5.
할아버지의 아버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 설레느니, 내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그러하니 내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아니면 날 죽게 내버려두게나!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보니 앞으로 나의 날들이 자연의 경건함으로 튀어오르기를. -「내 가슴은 뛰노니(My Heart Leaps Up)」- 이 시와 시를 지은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는 몰라도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구절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손자친구와 서로 수수께끼 내기를 했다. 친구가 물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저렇게 말하는 것." "···???···"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추가 힌트를 주었다. "신호등이 빨간색인데 길을 건너면서 초록불이라고 말하는 거." 정답은 '거짓말'이었다. 이.. 2021. 5. 2.
영화 『더 포스트(THE POST)』 1971년 6월 뉴욕타임스는 미국 펜타곤의 비밀문서를 폭로한다. 문서는 베트남 전쟁에 정식으로 개입하기 이전부터 미국이 저지른 음모와 조작, 은폐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닉슨 행정부는 타임스의 기사가 국방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며 기소를 했고 법원은 추가 보도 금지 명령을 내린다. 우여곡절 끝에 한발 늦게 비밀문서를 입수한 워싱톤 포스트는 후속 보도를 이어갔고 정치권력과 첨예하게 대립을 하게 된다.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더 포스트』는 이런 상황 속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 전말을 다룬다. 열정이 넘치는 편집장인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와 보도가 몰고 올 파장을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의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이성을 상실한 거대 국가권력의 음모와 압.. 2021. 4. 23.
비 오는 하루 비가 오는 날은 같은 음악과 커피를 듣거나 마셔도 맑은 날과는 느낌과 맛이 다르다. 혹은 보통 때와는 다른 분위기의 음악과 다른 맛의 커피를 찾기도 한다. 아내는 날이 우중충하면 평소에는 즐겨하지 않는 '달달이(케이크이나 쿠키)'를 궁금해 한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눅진한 감촉과 낮은 채도와 명도의 풍경이 만드는 분위기에 사람의 감정도 젖어들기 때문일까? 집안에 머물기 힘들게 만드는 화창한 날씨만큼 부산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듯 가끔씩 내리는 비가 싫지 않은 이유다. 근래에 들어 가끔씩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젊은 날에는 없던 일이다. 딸아이 결혼 전까진 맑으면 맑은 날씨를, 비가 오면 비를, 심지어 태풍이 오면 태풍을 이유로 아내와 딸에게 나들이를 종용하곤 했었다.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 아니냐며 .. 2021. 4. 13.
당나귀 두 마리 몇 해 전 세상을 잘 살고 있느냐를 검증하는(?) 농담 투의 질문이 있었다. 우리나라 중산층의 자격에 대한 풍자라고도 했다. 세상이 그다지 많이 변하지 않아서인지 요즘에도 질문과 풍자는 유효해 보인다. - 아직도 소형차를 타십니까? (예, 정확히는 소형차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가끔씩 타는 차는 딸아이네 비상용 차를 빌려 타는 것입니다.)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 (예, 태어나서 강북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아직도 증권 시세를 모르십니까? (예, 시세는커녕 그걸 어떻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질문에 답하다 보니 난 잘 살아오지 못했고 중산층도 아닌 듯하다. 특별히 억울하지는 않다. 그런 세태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아둔함을 아내와는 무슨 달관의 지혜였던 양 덤덤히 이야기할 때도.. 2021. 4. 9.
부활절에 묻는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아침에 동남아 오지에 계시는 수녀님으로부터 첫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그곳엔 비가 많이 와서 3일째 정전인 데다가 곳곳에 물난리로 모든 공소의 미사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내일이면 지붕이 날라간 집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걱정하시면서도 씩씩하게 '알렐루야, 알렐루야!!!'라고 외치듯 적어주셨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명동성당과 바티칸 성당의 부활절 미사를 보았다. 냉담에 코로나 핑계까지 더해져 미사 참석은(?) 진짜 오래간만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로마와 온 세상에’ 보내는 축복) 강론에서 '전염병 확산과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위기, 그리고 멈추지 않는 전세계의 무력 충돌'에 우려를 표했다. 교황은 최근 미얀마 사태에 대해서도.. 2021. 4. 5.
영화『러빙』 백인인 리처드와 유색 인종인 밀드레드는 서로 사랑을 한다. 밀드레드는 임신을 했고 둘은 결혼을 서두른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서 둘은 결혼을 할 수가 없다. 백인과 유색인종과의 결혼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은 어쩔 수 없이 컬럼비아 특별구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오지만 신혼의 단꿈이 가시기도 전에 체포된다. 두 사람을 체포한 경찰관은 말한다. "주님의 뜻이야. 참새와 울새가 다르게 태어난 건 다 이유가 있어." 두 사람은 기소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난다. 버지니아주에서는 25년 동안 함께 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버지니아에 사는 한 아이들도 법적으로 사생아가 된다. 판결문은 이렇게 말한다. "전능하신 신은 온갖 피부색의 인종들을 창조하신 후 .. 2021. 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