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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262

내가 읽은 쉬운 시 9 - 황동규의「즐거운 편지」와 김정환의 「가을에」 시인 황동규는 고등학교 시절, 연상의 여대생을 사랑하여 한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바로 「즐거운 편지」다. 1958년 그의 시단 데뷔작이기도 하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8 - 황진이 황진이(黃眞伊)에 대해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가 조선시대 최고의 명기였고,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로 불렸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사실 기록으로 전하는 것도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행적에 관한 것은 주로 야담을 통해 전해질 뿐, 정확한 생몰 연대조차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그가 지었다는 시조와 한시 몇 수가 남아있는 전부인 듯하다. 학창 시절, 우연히 접한 그의 시조 한 수는 나를 휘어잡았다. 교과서에 나왔던 “청산리 벽계수야......”로 시작하는 황진이의 또 다른 시조가 시시해 보일 정도였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모든 시는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7 - 유치환 딸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나는 해외 출장이 잦았다. 출장 가기 전날이면 딸아이는 가끔씩 엽서와 편지를 써서 아무도 몰래 나의 손가방이나 출장 짐 속에 넣어두곤 했다. 이국에 도착한 첫날 호텔방에서 짐을 풀 때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던 딸아이의 기특함. 나는 나중에 그 편지들을 작은 봉투 속에 모아서 출장을 갈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 호텔을 나서기 전 커피를 마시며 봉투를 열고 그것들을 하나씩 다시 읽어보노라면 신비로운 향기와 따뜻함 같은 것이 온몸으로 번져왔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만이 줄 수 있는 위로이자 행복이었다. 내가 편지를 마지막으로 쓴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십여 년 전 회사 일로 집과 가족은 울산에 두고 서울에서 장기 체류를 하며 주말 부부를..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6 - 이시영의「서시」 내일부터 명절 휴가가 시작되네요. 곧 긴 귀향 행렬이 도로를 채우겠지요. 올 설은 한국에서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먼 이국에 남아 있습니다. 애초 작년 4월로 예상했던 귀국 일자가 여러가지 사정으로 6월로 미뤄지더니 그 뒤로 한달한달 한 것이 여기까지 와서 이러다간 대보름달도 '미제(USA)'(?)로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급함에 쫓기지 않고 주어진 시간을 좀 달리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위 사진은 이름을 잊어버린 인도네시아 작가의 작품을 사진첩에서 스캔한 것입니다. 제목이 「뿔랑 깜뿡 PULANG KAMPUNG」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니어로 "뿔랑"은 '돌아간다'는 뜻이고 "깜뿡"은 '고향이나 시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뿔랑 깜뿡'..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5 - 김춘수의 「꽃」 *위 그림 : GRANVILLE REDMOND 1926년 작, 「CALIFORNIA POPPY FIELD」 내가 처음 읽은 시가 이발소 거울 위에 붙어있던 푸쉬킨의 시였듯이 반드시 시집을 통하지 않아도 경험한 시는 누구에게나 많이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편리한 도구가 있는 요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의식을 하든 안 하든 시는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 왔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나면서 김춘수의 시, 「꽃」을 읽어보거나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꽃」은 책받침이나 공책 겉표지에 장식용으로 자주 쓰여 있었고, “별이 빛나는 밤에”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같은 심야 라디오 방송의 애청자 엽서를 통해서도 흘러나왔다. 군대 시절, 여성과 펜팔을 나누던 고참이 ‘뭐 폼 나는 시 같..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4 - 윤동주 이발소 벽에 붙은 푸시킨의 시가 내가 맨 처음 읽은 시(詩)고, 한문투성이의 김소월의 시집이 내가 맨 처음 손으로 잡아본 시집이라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은 내가 맨 처음으로 산 시집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별 헤는 밤」을 배우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그 시가 너무 좋아서 더 많은 윤동주의 시를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서울 종로2가에는 서점들이 많았다. 당시의 서점들은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가장 큰 서점이 종로서적이고, 그 옆으로 규모가 좀 작은 양우당과 그보다 더 작은 대운당(?)이라는 서점이 가까이 있었다. 나는 윤동주의 시집을 양우당에서 샀다. 정확히 기억을 하는 이유는 왜 그랬는지 시집 안쪽 표지에 그것을 적어둔 탓이다. 40년이 다 되다가보니 흰색의 표지는 갈색으..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3 - 김소월 김소월은 시인으로선 천재였지만 사업가로선 그러지 못했던가보다. 광산과 신문사 지국의 경영이 실패하면서 소월은 낙담한 끝에 음독으로 32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소월은 생전에 단 한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1925년에 나온『진달래꽃』이 그것이다. 「먼 후일」은 그 시집의 맨 처음 나온 시라고 한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사실 먼 훗날까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표현은 완곡하나, 완곡하기에 더 강렬하다. 소월의 방식이다. 소월은 ‘이곳에 없는 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자주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식의 절제와 반..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2 - 김소월 한국사람 치고 김소월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사람 치고 김소월의 시를 한 편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사람 치고 김소월의 시를 빌린 노래를 한 곡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 자체와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시를 가사로 사용한) 노래에서 김소월은 가히 으뜸이다. 시야 그가 시인이니 접어두고 우선 그의 시를 가사로 사용한 노래를 꼽아보자. 동요 “엄마야 누나야”, 장은숙의 “못 잊어”, 정미조의 “개여울”, 우주용(혹은 양희은)의 “부모”, 사월과오월의 “님의 노래”와 “옛사랑”, 배철수가 속해 있던 활주로의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인순이가 속해 있던 희자매의 “실버들”, 마야의 “진달래꽃” 등 매우 많다. 소월이 쉬운 우리말로 쓴 시는 귀에도 쉽게 와 ..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1 - 뿌시낀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시를 읽는 재미. 재미가 있어 시를 읽는다. 솔직히 요즈음 시는 좀 어려워졌다. 세상이 복잡해지니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도 덩달아 복잡해진 탓일 것이다. 혹은 나의 감수성이 세파에 찌들어 메말랐거나 미처 젊은 시인들의 정서를 쫓아가지 못해서 나오는 괴리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어려운 시는 싫다. 복잡한 시적 기교나 장치, 상징이나 은유가 없는 단순명료한 시 - 그래서 구태여 (종종 시보다 어려운) 해설이 필요 없는 쉬운 시가 나는 좋다. 이해하는 만큼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쉬운 시라고 해서 쉽게 쓰여진 시는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수준이 낮은 것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쉬운 언어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시야말로 더 힘든 창작의 과정을 통해서 나왔을 것이다.. 2014.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