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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262

내가 읽은 쉬운 시 18 - 함민복의 시 두 편 대구로 옛 직장 상사의 딸 결혼식에 다녀왔다. 겨레붙이와 가까운 사람들의 축복 속에 새로 탄생한 젊은 부부가 환한 표정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KTX를 타고 오가는 동안 함민복의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을 읽었다. 그 속에 있던 시, 「양팔저울」을 새내기 부부에게 읽어주고 싶었다. 1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 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2 입과 항문 구멍 뚫린 접시 두 개 먼 길 누구나 파란만장 거기 우리 수평의 깊이 시 「양팔저울」을 꼭 부부 관계로만 한정 지어 읽지 않아도 좋겠다. '수평의 깊이'는 모든 관계에.. 2014. 7. 6.
내가 읽은 쉬운 시 17 - 정호승의 「너의 무덤 앞에서」 이 땅을 걸으면 오늘도 내 발목엔 너의 쇠사슬이 채였나보다 이 하늘을 바라보면 오늘도 내 두 눈엔 너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나보다 아들이 아버지를 묻어주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묻어주는 오늘밤 눈발이 날리는 산 모퉁이 하늘가로 울며 떠나가는 네가 보인다 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와서 또 다시 먼 길을 가는 자여 바람은 왜 어둠 속에서만 불어오고 새벽이 오기 전에 낙엽은 떨어지는가 송장 냄새 그득하였던 그 해 도시에는 바람도 창을 흔들지 않았고 싸락눈 맞으며 산새가 되어 어느 하늘 산길 가는 너를 쫓으며 나는 그 누구의 눈물에도 고향 하늘에는 가 닿을 수 없었다 - 정호승의 시, 「너의 무덤 앞에서」-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아무도 너희에게 가지 않았다. 2014. 5. 24.
내가 읽은 쉬운 시 16 - 엘뤼아르와 김광규 무심코 달력에 눈을 주니 이번 주말에 4.19가 있다. 4.19를 제때에 기억하는 사람이 요즈음엔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도 그렇다. 언제였던가? 사일구가 의거(義擧)인가 혁명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혁명이라면 무엇을 성취했고 ‘미완’이라면 무엇을 숙제로 남겼는가를 두고, 설익은 논쟁 끝에 자못 흥분하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뽈 엘뤼아르 P. ELUARD의 시는 그런 시절에 읽었다. 1895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엘뤼아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점령 되었을 때「야간통행금지」란 제목의 시를 썼다. 어쩌란 말인가 문은 감시받고 있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갇혀 있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거리는 차단되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도시는 정복되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도시는 굶주려 있었는데..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15 - 백석 *위 사진 : 2007년 경북 예천의 삼강리를 여행할 때 보았던 이 시대 남은 마지막 주막. 1900년께 지어졌다는 주막은 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치되었다가 2005년인가 경북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초가로 바꾸는 등 '복원' 사업이 진행될 거라는 소식이 있었으니 지금은 사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국생활을 하다보면 떠나온 고향 생각에 사로 잡힐 때가 있다. 길을 가다가 낯익은 풍경을 보았을 때, 무심코 컴퓨터 파일 속에 저장해둔 지난 사진을 클릭했을 때, 늦은 밤 출출한 속을 쓸어보다가 어떤 음식이 떠올랐을 때나 퇴근길 골목 식당의 삼겹살과 소주가 놓인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그리워질 때..... 평소에는 까맣게 잊고 지내던 감정은 미세한 인연이 스치기만 하면 곧바로..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14 - 한용운 *위 사진 : 서울 성북동, 일제 강점기에 한용운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심우장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한용운의 시「님의 침묵」은 어려웠다. 그의 또 다른 시 제목처럼 ‘알 수 없어요’였다. 시와 함께 실린 송욱이라는 분의 해설은 고등학생인 내게 시만큼(시보다) 어려워서 싫었다. 어려움은 한용운의 ‘님’에서 왔다. ‘님’이 포괄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 때문이다. 그것은 학창 시절 우리가 배운 대로 애인일 수도 있고, 조국이나 민족일 수도 있고, 수도자로서 추구하고 있는 절대적인 진리나 깨달음일 수도 있다. 한용운이 글에서 밝혔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편지와 면회와 휴가를 ‘군자삼락(軍子三樂)’으로 부르던 군대 시절, 시집 『님의 침묵』을 처음으로 읽었다. 근엄한 의미를 젖혀두고 ‘님..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13 - 김지하 *위 사진 : 80년대 풀빛출판사에서 재 간행된 시집 『황토』의 속표지 70년대 대학 시절, 친구들 네 명이서 독서회 비슷한 걸 만든 적이 있다. 원 취지야 책 읽고 토론하자는 것이었지만, 실제 한 일은 학교 앞 튀김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많았던 모임이었다. 특히 학과 공부건 독서회 공부건 모든 종류의 공부에서 ‘자유로웠던’(?) 나는 독서회 자체의 진행이나 준비보담 늦은 시각까지 술자리를 지키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어느 날 모임의 친구 한 명이 ‘가리방을 긁어’ 등사하여 '호치키스'로 찝은 허접한 형태의 등사물 한 부를 건네주었다. 등사물에는 김지하의 시집 『황토』와 담시(譚詩) 「오적(五賊)」이 옮겨져 있었다. 그 친구가 관계를 갖고 있던 학교 밖의 다른 모임에 가져온 것이었다. 친구에..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12 - 정지용의「춘설(春雪)」 번개 같이 한국엘 다녀왔다. '드디어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라는 귀국 인사를 쓰지 못하는 건 맥빠지는 일이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한국행은 반가운 일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날씨가 너무 포근해서 좋았다. 우수가 지나 이젠 봄 기운이 완연한 것 같다고 의례적인 짐작말을 했더니 주위 사람들이 올 겨울 내내 별로 춥지 않았다고 알려주었다. 식당에서 햇쑥을 넣어끓이는 도다리쑥국을 먹었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쑥냄새가 별로 나지 않았다. 식당 주인에게 말했더니, "2월쑥은 원래 향기가 없어요." 한다. 좀 더 봄이 무르익어야 한다면서.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11 - 고은의 「산 길」 오늘 우여곡절 끝에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이 금강산호텔에서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이 8-90대의 고령. 새삼스레 다시 설명할 필요 없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자 "남북통일 안 되면 아무것도 뜻없는" 이유입니다. 바람더러 너나들이로 하루 내내 걸었습니다 등짐도 정들으니 내 등때기 한몸이어요 원통거리 막국수 술 석잔 먹고 해는 깜박깜박 이 물 저 물에 저물었습니다 나그네새 북으로 가니 내년에 다시 오겠지 하고 바래주어요 아니됩니다 아니됩니다 내 아무리 이대로 복될지라도 몽구리 중놈으로 복될지라도 그걸로는 아니됩니다 외진 데 들꽃 바라보며 물 보며 하루 내내 강원도 산길 걸으며 맘먹었어요 남북통일 안되면 아무것도 뜻없습니다 그리운 그리운 우리 민주주의도 뜻없습니다 어느 뜻도 뜻이라면 통일이어요 저문 산골 황.. 2014. 5. 10.
내가 읽은 쉬운 시 10 - 이성부, 하종오, 신동엽 오늘은 곡우(穀雨). 봄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날이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난 봄은 대부분 환희와 부활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을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릴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봄」- 봄비와 함께 생명의 곡식들이 윤택해진다는 날에 나라 안팎으로 아픈 소식들이 줄을 잇는다. .. 2014.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