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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3 - 김지하

by 장돌뱅이. 2014. 5. 10.


*위 사진 : 80년대 풀빛출판사에서 재 간행된 시집 『황토』의 속표지


70년대 대학 시절, 친구들 네 명이서 독서회 비슷한 걸 만든 적이 있다.
원 취지야 책 읽고 토론하자는 것이었지만, 실제 한 일은 학교 앞 튀김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많았던 모임이었다. 특히 학과 공부건 독서회 공부건
모든 종류의 공부에서 ‘자유로웠던’(?) 나는 독서회 자체의 진행이나 준비보담
늦은 시각까지 술자리를 지키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어느 날 모임의 친구 한 명이 ‘가리방을 긁어’ 등사하여 '호치키스'로 찝은 허접한 형태의
등사물 한 부를 건네주었다. 등사물에는
김지하의 시집 『황토』와 담시(譚詩) 「오적(五賊)」이 
옮겨져 있었다. 그 친구가 관계를 갖고 있던 학교 밖의 다른 모임에 가져온 것이었다.

친구에게 시집을 건네받기까지 나는 시인 김지하에 대해 거의 알고 있지 못했다.
이름 석 자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이른바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용공단체’에 연루된 정치인사로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70년대 김지하의 시와 글은 당시의 정권으로부터 철저히 금기시 되어 일반 대중들이
접촉 경로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김지하란 이름 자체가 결코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불온함'의 상징이었다.

그날 저녁 등사본 속의 김지하의 시를 읽으며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때까지 나는 세상의 일을 막연히 재미라는 잣대 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재미가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모든 일을 진지함 보다는 흥미와 호기심으로 접근하고,
재미와 즐거움의 기준으로만 버리거나 선택을 하여 받아들인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설익고 유치한 수준이었다. 고민은 어설프고 깊이는 얕았으며 판단은 즉흥적이었다.

그러나 밤이 늦도록 반복하여 여러 번을 읽은 김지하의 시는 그때까지 배워온 교과서 속의
시와는 전혀 다른 표현과 감성으로 내 의식의 전방위를 압도 해왔다.
윤동주의 참신한 서정과 고결한 시인 정신이 끝내 개인의 범주에 머물렀다면,
김지하의 시는 자아의 공간을 벗어나(혹은 자아의 공간 속에) 넓고 깊게 세상과 역사를 아우르면서도,
예리하게 날을 벼린 비수를 지니고 있었다. 처절하고도 절박함이 묻은 비수였다.
오랫동안 아무런 갈등도 없이 쌓여온 나의 진부한 타성과 안일한 사고는 그 칼끝 앞에서 허약하게 무너져야 했다.
나는 그의 시를 다시 대학노트에 옮겨 적어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읽었다.


시만큼이나 감동적인 것이 시집 『황토』말미에 쓴 시인의 “후기”였다.
후기 속의 “시”란 단어를 “삶”으로 바꾸어서 읽으며 나는 삶에 대해 좀 더 겸허하거나
진지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반성과 깨달음으로 가슴이 뛰기도 했다.
끝내 삶의 본질을 꿰뚫는 올바른 성찰이나 전망에는 이르지 못 한 채,
삐꺽대는 막걸리 집 나무 탁자 위에 취한 푸념이나 늘어놓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대강 철저히’ 살고 있지만.

   
우리들의 의식은 가위 눌려 있다. 반은 잠들고 반은 깨인 채, 외치려 하나 외쳐지지 않고, 
   결정적으로 깨어나고자 몸부림치나 결정적으로 깨어나지질 않는다.
   
죽도록 몸부림치지만 그것은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고, 필사적으로 아우성치지만 그것은
   작은 신음으로밖에는 발음되지 않는다. 그 작은 신음. 그 작은 몸짓. 제동당한 격동의 필사적인
   자기표현으로서의 어떤 짧은 부르짖음.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 왔다, 악몽의 시로.

    이 작은 반도는 원귀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외침(外侵), 전쟁, 폭정, 반란, 악질(惡疾)과
   주림으로 죽어간 숱한 인간들의 한(恨)에 가득찬 비극의 예리한 의식,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 왔다, 강신(降神)의 시로.

   
찬란한 빛 속에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나도 빛을 원한다.
   원하지만 어찌할 것이냐? 이 어둠을 어찌할 것이냐? 어쩔 수도 없다. 다만 늪과도 같은 밤의 어둠
   으로부터 영롱한 저 그리운 새벽을 향하여 헐떡거리며 기어나갈 뿐이다. 포복. 잠시도 쉬지 않는
   피투성이의 포복.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왔다, 행동의 시로.

   
진흙창에서만 피어나는 연꽃의 숨은 뜻. 고졸(古拙)의 세계. 투명한, 가없는 물의 자유의 높이.
   그러나 그것은 끝없는 방황과 쉴 새 없는 개입, 좌절과 절망의 깊은 수렁을 통과해야만 얻어지는,
   끝내 버림받으면서도 끝끝내 사랑하는 뜨겁고 끈덕진 열정에 의해서만 비로소 얻어지는 값비싼
   고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에 대한, 모든 대상에 대한 사랑, 악몽도, 강신도,
   행동도 모두 이 사랑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사랑의, 뜨거운 뜨거운 사랑의 불꽃 같은
   사랑의 언어,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왔다.

    사랑의 상실, 대상에 대한 무관심, 그 권태야 말로 모든 우리들의 무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70년 12월 10일
                                                                                        
- 시집『황토』, 후기 -

늘 그렇듯 지난 며칠 사이에도 우리 주위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끔씩이지만 그런 일들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러나 매번 딱히 어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무력감이 되돌아온다. 『황토』의 후기는 그럴 때 읽는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관심' 은 모든 것의 출발점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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