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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25

여기도 꾸짖어 주시라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약속을 할 때 빼먹지 않고 한 가지 단서를 붙인다. '만약 손자저하를 보러 가야 할 사정이 생기면 이 약속은 급작스레 취소될 수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저하를 보러 가야 할 사정'은 대략 딸아이나 사위가 회사일이 바쁘거나 출장이 잡힐 때, 아니면 저하들이 갑자기 아플 때이다. 어른들의 회사일이야 대부분 예정되어 있어 돌발적인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저하들이 아픈 것은 대개 느닷없이 찾아온다. 게다가 두 저하들은 누구 하나가 아프면 릴레이를 하듯 돌아가며 아프곤 한다. 작년 가을에도 그러더니 이번 연말연시에도 2호가 먼저 열이 나고 가라앉는가 싶더니 뒤이어 1호가 독감을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다. 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저하인지라 웬만한 고열에는 끄떡없이 활기차게.. 2024. 1. 5.
'친구'와 '저하' 사이 코로나라는 이름도 생소한 바이러스가 어느 날 갑자기 엄습했다. 당황과 공포로 세상은 휘청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괴물체와 싸워야 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걸핏하면 문을 닫았다. 근처 학교에서 감염이 확인되어도 유치원은 지레 놀라 아이들의 등원을 금지했고 학부모들도 그런 결정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 결과 손자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보통 때 같으면 아파트 놀이터에서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제법 멀리 있는 파출소와 소방서까지 쏘다니며 보냈겠지만 주로 집에서 머물러야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는 이웃들과도 서로 침묵 속에 야릇한 긴장감을 느끼던 때였다. 하루종일 집에서 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뽀로로와 타요버스, 로보카 폴리에게만 어린 손자를 돌봐달라고 맡길 수.. 2023. 9. 21.
친구들이 있다 친구들은 매일 놀고 먹고 잔다. 웃고 울며, 떼를 쓰고 고집을 피우며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아내와 나는 늘 그런 모습과 목소리를 눈과 귀에 달고 산다. 1호가 내 핸드폰에 메모를 남겼다. "나는 원래 요리사가 될 꺼였다. 하지만 나는 과학이 더 재미있어서 과학자가 될 꺼였는데 내가 수요 축구에서 열 골을 넣고, 토요 축구에서 다섯 골을 넣어서 축구 선수로 바꿨다. 또 다른 이유는 내 모든 슛팅이 강해서에요." 지난 6월 아내와 나는 1호 친구와 태국을 여행했다. 여행 중 1호는 한국의 부모에게 카톡을 보냈다. "엄마 아빠, 오늘 스노클링 했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시면 금요일 오후에 만나요. 잘 지내시지 않으면 남은 시간 동안 잘 지내세요." "엄마 아빠, 할아버지가 .. 2023. 9. 2.
잠아 오지마라 둘째 손자저하에게 물었다. "어린이집에선 밥(점심) 먹고 나서 뭐 하지?" "잠 자." "그러면 집에선 밥 먹고 나서 뭐 해야지?" "놀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뭔가 나른한 신호가 오는지 부산하던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텔레비전을 보겠다고 한다. 요즘 저하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다. 그리고 잠과 맞서기 시작한다. 기세 싸움은 늘 팽팽하다. 잠자리에 들기를 거부하며 저하는 버티고 또 버틴다. 가끔은 먹으면서 조는(혹은 졸면서 먹는) 신공을 보여주기도 한다. 둘째 저하의 모습은 첫째의 기억을 소환한다. 몇 해 전 첫째도 둘째와 비슷한 나이에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졸고, 졸면서도 자러 가는 건 거부했다. 졸면서도 어서 밥을 먹고 키즈클럽에 가겠다는 투지를 보여주었다. 이미 여행 중.. 2023. 5. 30.
화상첨화(花上添花) 어젯밤 함께 잠자리에 누워 첫째 손자친구와 BTS의 노래를 들었다. 친구가 먼저 잠이 들어 휴대폰의 유튜브를 닫자 어디선가 토닥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일까? 컴퓨터라도 끄지 않은 것일까? 방 안을 둘러보다 빗소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빗소리가 아파트 방안까지 파고드는 걸 보니 제법 세차게 내리는 것 같았다. 커튼을 거두자 어두운 유리창에 맺혀 있는 빗방울이 보였다. 극심한 봄가뭄이라던데 기왕 내릴 거면 넉넉히 내렸으면 싶었다. 아침이면 아파트 정원과 산책길이 떨어진 꽃잎으로 가득해지겠지만 조지훈 시인의 말대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할 수야 있으랴. 지는 꽃은 져도 피는 꽃은 연이어 피어날 것이다. 진달래, 철쭉, 복사꽃, 살구꽃, 제비꽃, 민들레꽃, 씀바귀꽃, 엉겅퀴꽃, 얼레지꽃 외.. 2023. 4. 5.
친구들은 자란다 몇 해 전 도통 잠을 안 자려고 하는 손자친구에게 엄마가 말했다. "늦게 자면 할아버지 할머니도 내일 늦게 와." 손자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날 좋아해서 어차피 일찍 올 걸∼! " 그러던 친구가 코로나의 북새통을 지나 어느덧 유치원을 졸업했다. 축구와 스케이트와 스키에 이어 요즈음은 태권도의 스텝과 품세를 뽐내기도 한다. 귀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옷자락을 제치고 기마자세를 취했다. 비로소 드러난 위풍당당 초록띠! 그리고 초등학생이 되었다. 방문을 굳게 닫고 입산수도의 도인처럼 비장하게 공부에 매진하는 폼을 잡기도 한다. 방문엔 '11X 7=, 33X7 =, 63x3=, 99x7=' 같은 '어려운 공부'하니 출입을 금지해 달라는 공고문이 붙어 있다. 글씨 좀 잘 쓰면 좋겠지만, .. 2023. 3. 1.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2 딸아이네와 지난 연말에 갔던 가평 소재 아난티코드에 다시 다녀왔다. 그곳에서 내가 시간을 보내는 일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손자'친구'들과 놀면 되니 단순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손자'저하'들의 다양한 취향을 맞추려니 복잡하다. 더군다나 어린 두 '저하'들의 나이차를 극복할 수 있는 공통의 놀이를 찾는 것과 각각의 전하에게 적절한 시간배분을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종종 '할아버지 쟁탈전'이라고 좋을 상황이 생겨난다.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 손자친구·저하들의 성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나 1미터 이내의 거리유지가 필수다. 텔레토비와 띠띠뽀 덕분에 잠시 커피 마실 짬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아내는 다음부턴 나와 손자 둘만을 위한 방을 따로 얻어야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의 결론이 결국 '.. 2023. 1. 31.
오는 해, 가는 세월 아내와 맥주 한 잔씩을 나누어 마시며 한 해를 보내고 맞았다. 맥주 기운에 피곤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져 왔다. 지난 며칠 동안 손자저하들과 보낸 시간을 복기했다. 여러 번을 반복해도 아내와 내겐 물리지 않는, 감미롭고 따뜻한 무결점의 기억들. 시작은 1호의 방문이었다. 방문 첫날 1호는 무려 새벽 두 시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몇 시에나 잠이 들까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채근하지 않고 지켜본 결과였다. 1호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받은 산타의 선물을 자랑하고, 여러 가지 좋아하는 게임과 놀이를 한 번씩 선 보이고 난 후에도 잠자리에 들 마음이 별로 없어 보였다. 결국은 아내와 내가 사정하여 등을 떠밀어야 했다. 그런데도 1호는 아침에 7시가 채 안 되어 일어나 어깨를 흔들었다. 더 자자고 끌어 안으니 1분만.. 2023. 1. 1.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2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내겐 실감나지 않는 말이다. 첫째와 둘째 손자는 내게 완벽하게 동급이다. 첫사랑 손자1호는 조리원을 나와 우리 집에서 한 달 넘게 같이 보낸 것을 시작으로 같이 보낸 물리적 시간이 많았다. 해외여행도 몇 번 같이 했다. 특히 코로나 유행 시기에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다. 제 부모보다 아내와 나를 더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갈 만하다. * 이전 글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2017)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손자녀석을 보러 간다. 멀리서 나를 알아볼 때마다 녀석은 이제 막 시작한 걸음을 전 속력으로 가동시킨다. 끙끙거리며 품 안에 안길 때의 그 꼼지락거림과 냄새의 살가 jangdolbange.tistory.com 2호는 같이 보낸 시간이 1호에 비해 짧다... 2022.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