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42 "니들이 손자 맛을 알아?" 나보다 스무 살쯤 더 연세가 많은 분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한 어르신이 물었다."장돌뱅이 씨는 자식을 몇이나 두었나?""예, 딸 하나 있습니다.""아니 왜? 아들도 안 만들고 하나로 끝냈어?""요즘 세상에 아들 딸이 뭐 상관있나요? 더군다나 저희 때는 가족계획을 선전할 때라······"호기심으로 이번엔 내가 물었다."어르신은 자녀분이 어떻게······?""나? 나는 하나지.""예? 아니 어르신도 하나를 두셨으면서 왜 저를 나무라셔요?""아니, 아들이 그렇다구, 딸이야 세명이나 있지."하루는 나의 핸드폰 속 손자 저하 사진을 보고 안 됐다는 투로 그 어르신이 장난을 걸어왔다."외손주가 백 명 있으면 뭐 해. 친손주 한 명보다 못한 걸."나는 어처구니 없음을 과장했다."아니 어르신, 조선시대도 아니.. 2025. 6. 19. 생명의 나무들 딸아이 가족이 다녀갔다.어린이날 + 어버이날 = 어른이날?딸과 사위처럼 이른바 '낀 세대'는 고달프다. 부모에겐 이미 어린이가 아니고 자식들은 어려 아직 어버이로서 대접을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니 양쪽 세대에 다 봉사를 해야 한다.올해는 그나마 연휴가 길어 다행이다.아내와 나야 자주 만나니 우리집에는 올 필요 없이 나중에 보자고 했는데 친가와 외가의 공평한(?) 시간 분배를 주장하는 큰손자저하의 논리적 공박에 늦은 오후에 방문이 이루어졌다.부랴부랴 아내와 저하맞이 청소를 했다. 사람 사는 데는 가끔씩 손님이 다녀가야 한다. 덕분에 집이 깨끗해진다.청소와 동시에 바쁘게 음식을 만들었다.시간 관계상 비교적 간단한 명란파스타와 문어샐러드, 문어숙회를 준비했다.저하들을 위해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포장해 왔다. 최.. 2025. 5. 5. 고열? 멀리 차버려! 감기가 낫더니 장염. 2호의 열이 내리는가 싶더니 이번엔 1호가 목감기로 다시 고열.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걸핏하면 옮아오고 또 옮긴다. 열은 한번 오르기 시작하면 짧은 시간에 치솟기에 곁에서 지켜봐야 한다.병원에서도 열은 별다른 방도가 없어 가능한 해열제와 미온수로 집에서 잡아야 한다. 당사자인 저하들도 부모도 고생이다. 나도 그렇게 컸다. 내게 남아있는 어머니에 대한 최초의 기억도 그렇다.언제였던가요, 어머니. 세찬 비바람과 함께 천둥 번개가 치던 밤 저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지요. 그때 아마 저는 열 때문에 끙끙 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칭얼거렸던가요? 어머니께서 저를 어르시던 근심스러운 목소리가 기억이 납니다. 번개가 칠 때마다 파란색으로 변하던 방문의 창호지와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로 나.. 2025. 4. 26. 할머니의 설움 아빠 엄마(딸과 사위)가 퇴근하면 손자저하들과 작별할 시간이다.초등학생인 첫째는 아쉬움 속에 선선히 작별을 하지만, 둘째는 사소한 걸 트집 잡아 투정을 부리거나 평소에는 거부하던 책을 읽어달라기도 하고 (자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물건을 들고 와 무슨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양 수다를 늘어놓기도 한다.지연작전을 쓰는 것이다.할아버지는 남고 할머니 혼자 가라고도 한다."밖이 깜깜해서 할머니 혼자는 무서워."라고 하면 그제서야 낙담하며 포기를 한다.그게 반복되자 둘째는 묘책을 강구했는지 어느 날 내게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말하기도 했다."이따가 할머니 갈 때 할아버지는 방에 숨어 있어."며칠 전 딸아이가 둘째와 나눈 이야기를 카톡으로 알려주었다.둘째 : 할아버지는 언제 와?딸 : 일요일에 와 ~ 와서 .. 2025. 4. 19. 끝나야 할 것들 아직도 눈을 내리고 찬바람을 불어대는 겨울.'그 X' 탄핵.그리고 어린 손자의 감기. 2025. 3. 18. 아이들을 구하자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둘째저하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숲 속의 작은곰이다 어흥!" 하며 얼굴을 들이민다. 얼굴에 검은 점과 붉은 점이 찍혀있다. 이럴 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시늉을 해야 한다. 또 하루의 놀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둘째는 식구들에게 별명을 붙였다.엄마 아빠는 '일핑'이므로 일을 열심히 하고 늦게 늦게 집에 돌아오라고 이른다. '일핑'이란 저하가 즐겨보는 애니메이션 >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임의로 변형한 것이다. 할머니는 식사를 준비하는 '얌얌핑'이고 형은 숙제를 해야하므로(그래야 자기가 할아버지와 놀 수 있으므로) '할일핑'이이라고 한다. 나는 저하와 놀아주는(놀아주어야 하는) '놀핑'이다.이 모든 별명에는 할아버지와 가능한 오래 놀겠다는 저하의 의도가 숨어있다.나는 손자.. 2025. 2. 25. 겨울 끝까지 학교 앞에서 손자저하의 하교를 기다리는 일은 설레는 일이다.조금 과장을 한다면 연애 때 애인을 기다리는 것 같다.아내와 딸은 나와 저하가 전생에 연인 사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저하는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걸어 나오다 나를 볼 때면 갑자기 뒤돌아서서 뒷걸음을 걷거나 반대로 환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들기도 한다. 나로서는 두 가지 다 유쾌하다. 어떨 때는 눈에 안 띄게 숨어있다가 교문 앞에서 어리둥절해 이리저리 나를 찾는 저하 등뒤로 다가가 놀래켜 줄 때도 있다. (그런데 이건 한두 번 하고 나니 이제는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해서 나를 찾는 기색도 없이 그냥 친구들과 걸어가곤 한다. 그럴 땐 오히려 내가 놀래서 뒤쫓아가 자수를(?) 한다.) 날이 부쩍 추워졌다.그래도 손자저하는 얼.. 2024. 11. 21. 손자와 보낸 2박3일 손자저하 1호는 축구대회 참가차 아빠와 먼 지방에 가고, 딸아이는 회사 일로 바빠서 주말 2박 3일 동안을 2호 저하와 보냈다. 함께 소방서에 가고 우체국에 가고 아이스크림 가게와 식당엘 갔다.그리고 집 주위 다른 아파트를 돌며 '놀이터 호핑( Playground Hopping)'을 했다.늦가을답지 않게 바람도 없이 맑고 온화한 날씨가 둘만의 바깥 나들이를 도와주었다.집으로 돌아온 2호가 할머니에게 말했다."할아버지랑 놀아주느라 나 많이 힘들어요."그리고 나에게도 확인을 했다."나랑 노니까 할아버지도 재밌죠?"넷플릭스 키즈를 볼 때도 2호는 내 취향을 쿨하게 배려한다."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거 골라요.""그냥 니가 골라.""아니,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걸로."저하의 배려는 진심으로 보인다. 나는 어쩔 .. 2024. 11. 11. 추석 보내기 지난 설날에 손자 저하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시간에 맞춰 나는 우리가 사는 층보다 한 층 높은 계단에 몸을 감추고 저하들을 기다렸다. 저하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어서 오시라' 하며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저하들을 놀라게 했다. 별 것 아닌데 두 저하들이 깔깔거렸다.이번 추석에는 저하들의 예상을 깨기 위해 한 층 위가 아닌 아래 층 계단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2호는 차 안에서 잠이 들어 잠시 대기 중이라 했고 1호저하가 혼자서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리 오래 걸리지?' 생각하는 순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하는 나의 '서프라이즈'를 예상하고 다른 층에서 내려 등 뒤에서 제갈공명 같은 역습을 가한.. 2024. 9. 18.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