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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추석 보내기

by 장돌뱅이. 2024. 9. 18.

지난 설날에 손자 저하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시간에 맞춰 나는 우리가 사는 층보다 한 층 높은 계단에 몸을 감추고 저하들을 기다렸다. 저하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어서 오시라' 하며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저하들을 놀라게 했다. 별 것 아닌데 두 저하들이 깔깔거렸다.

이번 추석에는 저하들의 예상을 깨기 위해 한 층 위가 아닌 아래 층 계단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2호는 차 안에서 잠이 들어 잠시 대기 중이라 했고 1호저하가 혼자서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리 오래 걸리지?' 생각하는 순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하는 나의 '서프라이즈'를 예상하고 다른 층에서 내려 등 뒤에서 제갈공명 같은 역습을 가한 것이다.

그렇게 저하들과 올 추석 '적벽대전'을 시작했다.
사진을 찍을 틈조차 없는 치열한 '전투'였다. 동양의 장기와 서양의 체스, 태국 툭툭(Tuktuk)을 포함한 여러 차량들, 주문과 배달, 긴급출동과 체포 등의 긴박한 상황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좁은 집에서는 저하들의 폭발적인 에너지 공세를 감당할 수 없어  운동장으로 나가 축구'전투'를 해야 했다. 1호는 발로 여러 번 공을 차는 리프팅 연습을 하고 2호는 나와  패스를 주고받았다.
2호는 매번 내가 서있지 않는 방향으로 공을 차곤 내가 놀라서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1호가 딱 그 나이 때 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2호는 올 추석에 큰 보너스를 받았다.
지나가는 경찰차에 손을 흔들자 경찰차가 스피커로 '안녕'이라고 대답을 해다.
"경찰차가 진짜 말을 하네."
2호는 놀라워했다. 말을 하는 경찰차 패트와 폴리는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것이다.
경찰차를 따라가선 지구대 경찰관들의 환대에 경찰 스티커와 음료 선물까지 받았다.
그리고 정차 중인 경찰차에 타보는 감격까지 누렸다. 

전투도 먹어야 한다. 야간 전투 개시 전 밥을 먹었다.
올 추석 음식은 아내가 90%를 했다.
나는 옆에서 보조를 했다. 

 송편은 동네 유명 떡집에서 사 왔다. 어릴적 추석 며칠 전 송편을 찔 때 사용하는 솔잎을 앞산에서 따오는 것은 나의 몫이었는데 이젠 추억이 되었다.

소고기뭇국

예전 어머님이, 그리고 얼마 전까지 아내도  가끔씩 추석이면 토란국을 끓였다.
그 토란국이 저하들의 입맛을 자극할 수 없을 것 같아  대신 생각한 것이 소고기뭇국이다.

다진새우전

아내가 색다르게 준비한 다진새우전은 2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샐러드
소갈비찜

추석 이틀 전 1호저하는 문자를 주고받을 때 올 추석 음식을 예상했다.
갈비찜과 삼계탕! 강렬한 '외압성' 예상이었다.
갈비찜은 자발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삼계탕은 명단에 없었던 터라 사흘 뒤 저하를 보러 갈 때 가져가기로 했다. 다음번 설날엔 아내로부터 갈비찜 만드는 법을 사사(師事)할 생각이다.

블랙페퍼소스소고기볶음

이번 추석에 내가 만든 유일한 음식은 지난번 태국 여행에서 사 온 블랙페퍼소스로 볶은 소고기다.
아내와 내가 얼마 전 시험을 했을 때 맛이 괜찮아 딸과 사위 용으로 상에 올렸다.

저하들이 물러간 뒤 사랑스러운 '전투'의 흔적이 어지럽게 널린 방과 거실 위로 깊은 적막이 고즈넉하게 찾아왔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고' 하는 세간의 말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반가움 속엔 늘 못다 한 살가움과 애틋함이 섞여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기생충>>을 며칠 전 발리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비로소 봤다는 딸아이의 말은 저하 2명을 키우는 맞벌이부부의 삶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듯하다. OTT에 올라온 지도 한참이 되지 않았던가.
부모로서 못해준 부분인 듯해서 마음이 아프다.

달밤이면
살아온 날들이  

다 그립다  

만리가  
그대와 나 사이에 있어도  
한마음으로  
달은 뜬다  

오늘밤은  
잊으며  
잊혀지며  
사는 일이  
달빛에  
한생각으로 섞인다  

- 김초혜, 「만월(滿月)」-

하늘에 뜬 달을 보며 세상을 떠나 그곳에 있는 겨레붙이와 지인들도 잠시 생각했다.
오늘밤은 그 모든 사람들이 평안하기를, 우리의 생각과 기억도 그러하기를 빌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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