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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저하34

네 발에서 두 발로 큰 손자저하가 두발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모가 날렵한 자전거를 사주었다. 이제 한두 번 타 본 거라 아직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지만 어려운 게 아니니 곧 몸을 세우고 달리게 될 것이다. 나도 비슷한 나이에 두발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때까지 탔던 세발자전거가 시시해져 버리고 나면 어른 자전거를 탈 때까지는 키가 작아 기다려야 했다. 당시에는 레저용 자전거라는 것이 없었다. 주위에 있는 어른 자전거는 대개 모두 짐을 싣는 용이었다. 우리집에는 그마저도 없었다. 농산물은 리어카나 소달구지로 실어날렀기에 구태여 자전거가 필요 없었다. 동네 다른 친구들의 사정도 같았다.나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동네 쌀가게의 배달용 자전거로 배우기 시작했다.가게 점원은 20대의 청년이었는데.. 2025. 4. 25.
할머니의 설움 아빠 엄마(딸과 사위)가 퇴근하면 손자저하들과 작별할 시간이다.초등학생인 첫째는 아쉬움 속에 선선히 작별을 하지만, 둘째는 사소한 걸 트집 잡아 투정을 부리거나 평소에는 거부하던 책을 읽어달라기도 하고 (자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물건을 들고 와 무슨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양 수다를 늘어놓기도 한다.지연작전을 쓰는 것이다.할아버지는 남고 할머니 혼자 가라고도 한다."밖이 깜깜해서 할머니 혼자는 무서워."라고 하면 그제서야 낙담하며 포기를 한다.그게 반복되자 둘째는 묘책을 강구했는지 어느 날 내게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말하기도 했다."이따가 할머니 갈 때 할아버지는 방에 숨어 있어."며칠 전 딸아이가 둘째와 나눈 이야기를 카톡으로 알려주었다.둘째 : 할아버지는 언제 와?딸 : 일요일에 와 ~ 와서 .. 2025. 4. 19.
38.0 우리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다.아주 작은 상처라도 그곳에 온 신경이 쓰인다.가족의 중심은 아픈 사람이다. 손자저하 2호가 감기에 걸렸다.나머지 식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연스레 2호에게로 모아진다.일상이 단순해진다. 유치원에 보낼 수도 없다.다행히 독감은 아니라지만 열이 높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잔기침도 한다.그런 증세의 중심은 열이다.38.0 도. 해열제 투입의 기준 체온이다. 그 이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된다.어쩔 수 없이 약을 먹이게 되더라도 투입 시간의 간격을 늘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모든 수단이라고 했지만 사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미지근한 물로 몸과 목, 머리 등을 닦아주는 일 뿐이다. 물론 저하가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정작 '모든 수단'은 거.. 2025. 3. 19.
돌아가야 할 곳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가장 유서 깊은 건물 판전(板殿)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이 글씨를 썼다.  나 같은 문외한의 눈엔 대가의 것이라기엔 어린아이가 장난이라도 한 것처럼 투박하고 유치해 보인다. 그러나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 즉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은 마치 사람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행복이 기교(巧)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박함(拙)에 있다는 가르침 같기도 하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천국을 결코 볼 수 없으리라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도 한다.봄날,나무벤치 위에 우두커니 앉아를 본다왜 푸른하늘 흰구름을 보며 휘파람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 주는 것은 Job이 되지 .. 2025. 3. 8.
저하 다녀가다 큰 손자저하가 일박이일로 다녀갔다. 방학을 하면 며칠은 와서 자고 가곤 했는데 이번 겨울 방학은 저하의 일정이 워낙 바빠서 아내와 내가 가야만 만날 수 있었다. 저하가 축구에 빠져 있어 매일 저녁 훈련을 하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가끔씩 손님이 와야 집은 단정해지고 매무새가 잡힌다.아내는 정리와 청소를 하고 나는 식사를 준비했다.첫 식사는 저하가 가장 좋아하는 치킨마요로 준비했다.오기 전에 음식에 대해 문자로 저하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스무고개를 했다.- 외식입니까? (아닙니다.)- 국물이 들어갑니까? (아닙니다.)- 치킨이 들어갑니까? (옙)- 치킨마요! (딩동댕!)이미 수차례 검증된 음식이라 엄지척을 받았다.이튿날 아침엔 야심차게 바나나 팬케익을 만들었다. 저하로부터 '먹을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먹.. 2025. 3. 4.
아이들을 구하자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둘째저하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숲 속의 작은곰이다 어흥!" 하며 얼굴을 들이민다. 얼굴에 검은 점과 붉은 점이 찍혀있다. 이럴 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시늉을 해야 한다. 또 하루의 놀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둘째는 식구들에게 별명을 붙였다.엄마 아빠는 '일핑'이므로 일을 열심히 하고 늦게 늦게 집에 돌아오라고 이른다. '일핑'이란 저하가 즐겨보는 애니메이션  >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임의로 변형한 것이다. 할머니는 식사를 준비하는 '얌얌핑'이고 형은 숙제를 해야하므로(그래야 자기가 할아버지와 놀 수 있으므로) '할일핑'이이라고 한다. 나는 저하와 놀아주는(놀아주어야 하는) '놀핑'이다.이 모든 별명에는 할아버지와 가능한 오래 놀겠다는 저하의 의도가 숨어있다.나는 손자.. 2025. 2. 25.
설날 보내기 어릴 적 명절의 기억이 풍요로운 건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송편과 토란국, 가래떡과 떡국, 너비아니와 저냐, 갓 구운 김과 유과(油菓)······음식은 기억이라는 말과 명절은 음식이라는 말은 서로 통한다.손자저하 1호에게도 그런 것 같다.저하에게 명절은 할머니의 갈비찜과 자기가 원하는 몇 가지 음식을 먹는 날이다.아내와 저하맞이 음식 준비를 했다.아내는 오래간만에 부엌에 서서 갈비찜과 얼마 전 저하가 원했던 두부새우전, 그리고 샐러드와 떡만둣국을 만들고 나는 도토리묵을 쒀서 김장김치와 무쳤다. 그리고 봄동으로 겉절이를 만들었다.부엌에 서서 음식을 만들다 보면 집밥엔 정성이 기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재료의 선택과 손질에서부터 조리까지 엄격하거나 절제를 하게 된다. 엄격이나 절제는 정성의 바탕이자 표현이다.. 2025. 1. 30.
겨울 끝까지 학교 앞에서 손자저하의 하교를 기다리는 일은 설레는 일이다.조금 과장을 한다면 연애 때 애인을 기다리는 것 같다.아내와 딸은 나와 저하가 전생에 연인 사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저하는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걸어 나오다 나를 볼 때면 갑자기 뒤돌아서서 뒷걸음을 걷거나 반대로 환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들기도 한다. 나로서는 두 가지 다 유쾌하다. 어떨 때는 눈에 안 띄게 숨어있다가 교문 앞에서 어리둥절해 이리저리 나를 찾는 저하 등뒤로 다가가 놀래켜 줄 때도 있다. (그런데 이건 한두 번 하고 나니 이제는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해서  나를 찾는 기색도 없이 그냥 친구들과 걸어가곤 한다. 그럴 땐 오히려 내가 놀래서 뒤쫓아가 자수를(?) 한다.)  날이 부쩍 추워졌다.그래도 손자저하는 얼.. 2024. 11. 21.
추석 보내기 지난 설날에 손자 저하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시간에 맞춰 나는 우리가 사는 층보다 한 층 높은 계단에 몸을 감추고 저하들을 기다렸다. 저하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어서 오시라' 하며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저하들을 놀라게 했다. 별 것 아닌데 두 저하들이 깔깔거렸다.이번 추석에는 저하들의 예상을 깨기 위해 한 층 위가 아닌 아래 층 계단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2호는 차 안에서 잠이 들어 잠시 대기 중이라 했고 1호저하가 혼자서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리 오래 걸리지?' 생각하는 순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하는 나의 '서프라이즈'를 예상하고 다른 층에서 내려 등 뒤에서 제갈공명 같은 역습을 가한.. 2024.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