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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아이들을 구하자

by 장돌뱅이. 2025. 2. 25.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둘째저하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숲 속의 작은곰이다 어흥!" 하며 얼굴을 들이민다. 얼굴에 검은 점과 붉은 점이 찍혀있다. 이럴 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시늉을 해야 한다. 또 하루의 놀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둘째는 식구들에게 별명을 붙였다.
엄마 아빠는 '일핑'이므로 일을 열심히 하고 늦게 늦게 집에 돌아오라고 이른다. '일핑'이란 저하가 즐겨보는 애니메이션  <<티니핑>>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임의로 변형한 것이다.
할머니는 식사를 준비하는 '얌얌핑'이고 형은 숙제를 해야하므로(그래야 자기가 할아버지와 놀 수 있으므로) '할일핑'이이라고 한다. 나는 저하와 놀아주는(놀아주어야 하는) '놀핑'이다.
이 모든 별명에는 할아버지와 가능한 오래 놀겠다는 저하의 의도가 숨어있다.

나는 손자저하들에게 인기가 많은 할아버지다.
자타가 공인하는 바 가히 BTS나 뉴진스 급이다.

얼마 전부터 둘째 저하와 저녁에 헤어지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첫째가 그랬듯이 둘째저하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붙잡기 때문이다. 울면서 떼를 쓸 때도 있다. 

할머니에게 혼자 집에가라고도 한다.
밖이 깜깜해서 무섭다고 하면 수긍이 간다는 듯 포기를 한다.
이걸 몇번 반복하더니 한 번은 저하가 내게 신박하고 은밀한 제안을 했다.
나름 오래 생각 끝에 내놓은 혜안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할머니가 집에 갈 때 할아버지는 방에 숨어 있어요."

첫째저하는 이젠 커서 예전처럼 더 있다 가라고 매달리지 않는다.
하지만 저하가 아내와 내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편안해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첫째는 나와 둘이서 장기를 두거나 둘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시간이 많을 땐 아내도 참석하여 보드게임을 한다. 아니면 프리미어축구(EPL)를 보거나 (아주 드물게는) 혼자서 책을 읽는다.

축구에 진심인 첫째는 선수들이 볼을 빼앗기거나 실수를 할 때면 큰 소리로 지적을 한다.
"아니지! 저럴 땐 왼쪽으로 패스 했어야지."
"오른쪽으로 벌렸어야 공간이 나오지."  
(아마 축구팀 코치의 말투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와 나는 마음속으로만 빌어본다.
'저하, 바라건대 부디 저기 저 팀의 후보선수라도 되소서!'

며칠 전 저하들이 개학을 앞두고 머리를 깎았다.
단골미용사가 특별히 첫째의 앞머리를 세워주었나 본데 저하는 이 모양새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외모에 좋고 싫음이 생겼다는 것은 저하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겠다.
아내와 나로서는 머리를 세워도 눕혀도 예쁘기만 하지만.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소풍 전날 아버지가 플라스틱 물통을 사주셨다.
긴 끈이 달려 어깨에서부터 매는 원통형의 물통이었다.
나는 물통이 등 뒤쪽으로 가게 매고 싶은데 가게 주인과 아버지는 왜 그랬는지 옆구리 쪽으로 가게 매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가게문을 나설 때는 할 수 없이 어른들 뜻대로 했지만 소풍 갈 때는 내 마음대로 뒤쪽으로 가게 맸다. 사실 어떻게 매든 무슨 큰 차이가 있었겠는가.
( 이 얘기를 하면 아내는 당신도 멋을 부리려고 고민한 적이 있구나!, 하고 놀린다.)

20세기 초 격변의 시대 상황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 중국 현대소설의 개척자라 일컬어지는 루쉰(魯迅)의 한 소설은 이런 말로 끝난다.
"아이들을 구하라."
혼란의 끝판인 듯한 세상에 천진난만한 손자들을 보며 생각한다.
손자들과 손자들의 앞날을 구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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