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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들통난 꼼수

by 장돌뱅이. 2025. 2. 21.

여권 만료일이 다가와서 아내와 함께 새로 만들기로 했다.
재발급엔 사진 한 장이 필요했다.

책상 서랍에 보니 여러 가지 지난 사진이 많았다. 
증명사진, 여권 사진, 비자용 사진, 명함판 사진, 알 수 없는 크기의 사진 등등.
문제는 6개월 이내 촬영되었어야 한다는 여권 갱신 조건에 맞는 사진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그 중에서 크기만 맞는 걸로 아무거나 한 장 골라서 쓰자고 했다.
"6개월 이내에 찍었다고 하면 되잖아? 무슨 차이가 있겠어?"
'모범시민'인 아내는 별로 내켜하지 않아 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종종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 않던가.
아내는 마지 못해 내 의견에 떠밀려 언제 찍었는지 모를 사진을 들고 구청엘 갔다.

여권 담당 공무원은 좀 의심스러워하는 눈치로 사진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6개월 이내에 찍은 사진 맞나요?"
나는 속으로 찔끔했지만 태연을 가장하고 그렇다고 했다.
지난 여권들을 펼쳐놓고 중복되지 않는 사진을 골라갔기 때문에 완전 범죄의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접수를 거의 마치려던 순간 꼼수는 들통이 났다.
"선생님 이거 10년 전 사진이네요."
담당은 여권 속에 붙어있는 미국비자를 펼쳐 보였다.
여권사진에만 주목 하느라 그 안에 있는 비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명백한 증거 앞에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 아내의 지청구를 받으며 구청 앞 사진관으로 가서 비싼 급속 사진을 찍어야 했다.
"내가 이렇게 늙었나?"
컴퓨터 화면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고르며 내가 말하자 사진관 주인이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말합니다."
10년 전 사진과 비교해보니 정말 폭싹 늙은 느낌이 들었다.
접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아내의 무수한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도대체 얼굴이 화끈거리고 미안해서 혼났네." 
여러분! 우리 법을 지키며 삽시다.

우여곡절 끝에 새 여권을 만들었다.
내가 여권을 처음 만든 것은 30여 년 전이었다. 회사일로 해외 주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여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유총연맹(?)에선가 안보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 내용이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로 해외에서 수상한(북한?) 사람의 접근을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처음 가본 외국은 인도네시아였고 두 번째로는 싱가포르, 그리고 세 번째는 중국이었다.
당시에 중국을 가려면 중국 비자는 물론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특정국가여행허가'를 받아야 했다.
흔히들 '특정국가'라 하지 않고 '적성국가'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다.

나는 장돌뱅이로 직장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주 무대는 동남아였고 미국과 멕시코, 유럽과 아프리카로 쏘다녔다.
몇 해전 무슨 일로 출국증명서를 떼었다가 200회가 넘은 출국 기록을 보고 놀란 적도 있다.

가족이 함께 살았던 인도네시아를 제외하고 업무 아닌 가족여행으로 처음 간 곳은 태국이었다.
그 뒤로 인도네시아 발리와 태국 전역은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가 되었다.

여권을 또다시 갱신하는 10년 뒤에 나는 또 얼마나 변해 있을까?
그때는 사진을 재활용하지 않고 다시 찍어야지.
얼굴은 더 폭싹 늙었겠지만 여전히 해외를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의 기운은 남아 있기를!
하지만 앞날보다 우선은 새 여권의 빈칸을 아내와 새로운 여행의 도장으로 채우는 일만 생각하고 싶다.

거리에서 여행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어
  

세계지도를 펼치면  
거기쯤에 있을 것 같아
내가 떠나온 고향이
  

흥분의 지퍼를 밀고 당기고
가방 속에 아침과 저녁이 들어왔다, 나갔다  
자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리다 
 

그날이 다가오면  
이미 진이 빠져  

터미널에 내려  
무서운 자유의 광풍이 불면  
전 생애를 끌고 어그적 어그적,
하룻밤 잘 곳을 찾아 
 

다음날 아침에는 지도를 보며  
새로운 도시를 정복할  
구두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최영미,「나의 여행」-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지막 연이 다소 뜬금없이 비장 또는 진지하다.
그 윗연까지가 아내와 나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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