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민복11

화계백일홍 아파트 화단에 벚꽃이 흐드러져 야간 산책에도 보기가 좋더니 어디 잠깐 다녀오는 사이에 다 떨어져 버리고 어느새 푸른잎이 성기게 돋아나 있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쉬워하긴 아직 이르다. 철쭉, 튤립, 라일락이 뒤를 이어 화사하다. 화무십일홍이 아니라 화계백일홍(花繼百日紅)이다. 와아! 가끔은 꽃무더기 앞에 서 볼 일이다. 탄성에 실어 각진 세상에 다친 마음을 날려보내기도 할 일이다.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 함민복, 「봄꽃」- 2024. 4. 18.
보름달 속의 반달 제주도에서 귤을 구입했다. 양이 한 박스나 되니 까먹는 것 이외에도 소비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인터넷과 책으로 귤 요리를 찾아보았다. 이미 알고 있는 귤된장무침을 포함하여 샐러드에 활용할 수 있는 레시피들이 나와 있었다. 눈 내린 거름더미 귤껍질 소복 멀리 제주도에서 뭍을 향해 던진 반달 꽉 찬 공들 방방곡곡 수천수만의 입에서 터지는 오, 향기의 파편 스트라이크! -함민복, 「귤」- 손자와 나눈 수수께끼, "겉은 보름달인데 속엔 반달이 들어 있는 것은?"과 비슷한 이미지가 함민복의 시에도 들어 있다. 반달을 채운 수천수만의 파편이 터지며 입 안에 번지는 새콤하고 싱싱한 향기! 2022. 1. 8.
주꾸미 이야기 주꾸미는 낙지, 문어처럼 머리에 발이 달려 두족류에 속한다. 주꾸미의 머리는 사실 몸통이다. 그 안에 소화기관과 내장, 아가미, 생식기도 들어있다. 여덟 개의 다리 한가운데에 입이 달려있다. 다리에는 흡인력이 엄청 센 빨판이 붙어 있다. 2007년 태안 앞바다에서는 주꾸미가 고려청자를 끌어안고 올라와 바다 밑 보물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이 주꾸미를 강장식으로 치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는 서해안에서 많이 잡힌다. 충남 서천에서는 주꾸미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보통 '쭈꾸미'라고 하지만 주꾸미가 표준이다. '돈가스'가 아니고 돈가스인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조만간 짜장면과 자장면처럼 두 가지가 다 인정받지 싶다. 한자어로는 '웅크릴 준'을 써서 '준어(蹲魚)로 부른다. 『자산어보』에서는 '죽.. 2021. 4. 6.
영화 『어톤먼트』 한 영상 강좌에서 그 영화(소설) 『어톤먼트(ATTONMENT)』에 대한 감상문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영화 속 최고의 피해자이자 주인공인 "로비"의 입장에서 짧게 적어 보았다. ------------------------------------------------------------------------------------------ “이 거짓말쟁이들! 거짓말쟁이들!” 어머니는 내가 압송되어 가는 차를 두드리며 절규했다. 나는 수갑에 묶여 어떤 위로의 몸짓도 어머니에게 전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절절한 외침은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그렇게 영문도 모르는 채 강간범이 되었다. 나는 권력과 부를 가진 집안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자식이었을 뿐이고 현장 부재 증명을 위한 나의 설명과 변명은 무력했.. 2021. 2. 17.
먼저 손을 씻고 어느 날 손자친구와 놀다가 찍은 사진이다.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 마스크 없이 투명한 허공으로 오르며 깔깔거리던 웃음소리. 사진만으로 숨통이 트일 것 같은, 저런 날이 언제 있었나 싶다.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 함민복, 「반성」 - 지난 일 년을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는 코로나만큼이나 종교 단체 때문에 고통을 받은 것 같다.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일터에서 떠나고 있는데, 그들만 예외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이 나 같은 냉담자의 구원을 위해서도 존재한다면, 예배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손부터 씻는' 겸손함으로 세상에 다가서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마태오복음에 나온 말씀을 나는 과문한 .. 2021. 1. 15.
음식은 기억이다 일요일이면 손자친구와 하루종일 함께 뒹군다. 요즈음은 친구가 사소한 일에도 삐지는 일이 잦아 조심하지만, 한편으론 그 모습이 귀여워 일부러 친구를 삐지게 만들어볼 때도 있다. 주중에는 아내와 친구를 포함한 모든 가족을 위해 책과 인터넷을 참고하여 음식을 만든다. 일차적으로 아내와 나누지만 아내의 엄정한(?) 평가를 거쳐 선별한 음식은 딸아이 가족과 나누는 일요일의 만찬에 올린다. 아직 매운 맛에 약한 친구를 위해선 별도의 음식이 필요하다. 영화 『심야식당』」에서는 "무엇을 먹느냐 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음식은 혀를 거쳐 기억으로 간다. 맛은 그 기억의 총체이다. 아내와 내게 레이니어 체리(RAINIER CHERRY)에는 시애틀 여행이 스며있다. 그곳에서 레이니어.. 2020. 6. 10.
내가 읽은 쉬운 시 145 - 함민복의「게를 먹다」 꽃게라는 이름은 ‘곶해(串蟹)’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곶’은 꼬챙이의 옛말로 게의 등딱지 좌우에 있는 두 개의 날카로운 뿔을 의미한다. '곶해'가 곳게로 다시 꽃게로 바뀌었을 것이다. 한자어로는 '화살 시'를 써서 시해(矢蟹)라고도 한다.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두 눈 위에 한 치 남짓한 송곳 모양의 것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명이 있다. 또 "대체로 게는 모두 잘 달리나 헤엄은 치지 못하는데 이 게만은 부채 같은 다리로 물속에서 헤엄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영어 이름도 스위밍 크랩(swimming crab)이다. 꽃게는 봄엔 알이 가득 한 암게를 가을엔 살이 쫀득쫀득한 수게를 먹는다. 간장게장은 6월 암게로 담근다. 암게와 수게의 구분은 보통 하얀 배 쪽을 보고 한다. 암게는.. 2019. 10. 12.
내가 읽은 쉬운 시 101 - 함민복의「밴댕이」 주말에 음식 몇가지를 만들었다. 일요일 저녁엔 파전을 만들어 막걸리와 먹었는데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이제까지 만들어 본 파전 중 가장 맛있게 된, 시쳇말로 '인생파전'이었다. 이마트에서 시음 행사를 하기에 사온 막걸리의 이름은 "인생막걸리"였다. 두 '인생'을 사이 두고 아내와 보내는 시간, 그것마저 '인생시간'이길 바라는 건 욕심이겠다. '라이프 베스트' 보다는 편차없는 평균치의 하루하루가 나는 더 좋다. 큰 의미나 단호한 결단, 가슴 울리는 감동도 필요없는, 그저 '어제와 같은 하루'의 반복.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산책하고 아내와 손 잡고 해지는 하늘도 바라보는. 1. 밴댕이 혹은 디포리 "밴댕이 소갈머리라니!" 아내가 가끔 나의 속좁음을 힐난할 때 하는 말이다. 요즈음은 함민복의 시로 댓거리.. 2019. 4. 22.
내가 읽은 쉬운 시 32 - 함민복의「가을」 맹렬하던 매미 울음이 어느 날부터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아내와 저녁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아파트 화단엔 풀벌레 소리가 가득 합니다. 가을이 온 것입니다. 소슬한 밤기운에 창문을 닫다가 함민복 시인이 전해 주었던 단 한줄의, 그러나 긴 여운의 시를 떠올렸습니다.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2015.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