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영화 『어톤먼트』

by 장돌뱅이. 2021. 2. 17.

한 영상 강좌에서 그 영화(소설) 『어톤먼트(ATTONMENT)』에 대한  감상문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영화 속 최고의 피해자이자 주인공인 "로비"의
입장에서 짧게 적어 보았다.

------------------------------------------------------------------------------------------


“이 거짓말쟁이들! 거짓말쟁이들!”

어머니는 내가 압송되어 가는 차를 두드리며 절규했다.
나는 수갑에 묶여 어떤 위로의 몸짓도 어머니에게 전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절절한 외침은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그렇게 영문도 모르는 채 강간범이 되었다.
나는 권력과 부를 가진 집안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자식이었을 뿐이고
현장 부재 증명을 위한 나의 설명과 변명은 무력했다. 대신 강간 현장에서 나를 목격했다는
주인집 어린 둘째 딸 브라이오니의 거짓 증언은 강력한 무게와 효력을 지녔다.
왜 그녀가 나를 지목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언니, 세실리아를 사랑했다는 것이 죄였을까?
왜 세실리아는 좀 더 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나섰지만 그녀의 발언도 무력했을까?
아니면 그녀도 혹시 나의 무고함을 확신하지 못했을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나는 끌려갔고 내 앞에는 감옥이냐 아니면 대신에 전쟁터로
나가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결국 전쟁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패전으로 적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의사의 꿈도, 사랑하는 세실리아와의 만남도,
어머니의 기대와 희망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브라이오니의 거짓말로 나의 운명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전쟁터로 떠나오기 전 세실리아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조차 멀리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먹함이 사라지고 나자 다시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언젠가 바닷가 파란 창틀이 있는 흰색의 별장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세실리아가 전해준 그곳의 사진을 늘 가슴속에 품고 다녔다.  ‘가없이 푸른 바다와
흰색의 우뚝한 절벽, 그리고 파도 소리 가득한 해변을 그녀와 걸어보리라’ 꿈을 꾸면서.
그것은 세실리아가 보내주는 편지와 함께 내게는 전쟁을 견디는 유일한 힘이었다.


브라이오니는 나를 좋아했을까? 그랬던 것 같다.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질투와 시기에 사로 잡혀 나를 질곡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4년이 지난 이제야 후회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한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시시각각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참혹한 전쟁터로 내몰려 회복할 수 없이 망가져버린
나의 삶에 그녀를 뉘우침을 받아들일 여력은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가해자의 자책과 상처를
앞세워 속죄와 용서의 과정조차 자신의 것으로 만든 그녀의 일방통행은 더욱 나를 힘들게 한다.


이제 용서는 신의 영역이지만 그럼에도 브라이오니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사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변명도, 미화도, 설명도 없이’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다. 
후회도 참회도 속죄도 용서도 만약에 가능한 것이라면 그다음의 일이다.

-----------------------------------------------------------------------------------

우리는 지나간 ‘죄’에 대해, 그것이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쉽게 화해와 용서를 말하곤 한다.
무죄한 이들이 받은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온전히 회복될 수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화해와 용서 대신에 ‘죄’에 대해 묻는 되새김질에 지치지
않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하물며 실체조차 파악되지 않은 지난 ‘죄’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겠다.
미래는 과거에서 온다고 하지 않던가?

함민복의 시에서는 ‘죄의 날이 무뎌질 때 삶이 흔들린다’고 했다.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칼날처럼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겁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함민복, 「죄」-

'일상과 단상 > 내가 읽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숲 산책  (0) 2021.03.01
죽음에 대하여  (0) 2021.02.25
시대의 이야기꾼, 별이 되다  (0) 2021.02.16
울지 마라  (0) 2021.02.04
춤추는 은하  (0) 2021.01.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