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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시대의 이야기꾼, 별이 되다

by 장돌뱅이. 2021. 2. 16.


나는 내가 직접 전령사가 되고 싶었다. 한 손에는 만고강산을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그리고 거리의 아우성을 함께 몰아서 치는 징을 들고 또 한 손엔 바람찬 산마루턱에
봉화를 당길 횃불을 들고 어기차게 달리는 옛이야기의 주인공 말이다.
담아, 우리 집안이 본래 어떤 집안인 줄 아느냐? 우리 집안은 비록 화려하진 못했으나
한없는 이야기꾼의 집안이었음을 너희들에게 상기시키고 싶구나. (···)
한겨울 가루눈이 지향없이 내리는 깊은 밤 , 주린 속은 쓰리고 옛이야기는 달리고 화로의
불길마저 시들어가는  밤이면 울타리 너머 수수밭을 달리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스산했다.
이럴 때면 할머니는 백두산 준령을 넘나드는 독립군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저 바람소리는 독립군의 말 달리는 소리라고. 왜놈 병정을 쥐 잡듯 하고 묏돼지 피로 허기를
달래고 산불에 의해 녹아내리는 얼은 물로 목욕을 할 정도로 무쇠 덩어리인 , 아, 신화 같은
우리 독립군. 이때 나도 이다음에 크면 독립군이 될 거라며 웃통을 벗고 으쓱대면 그때서야
증조할머니는 옷을 화롯불에 쬐여 목화처럼 하얗게 쓴 이를 잡곤 하셨다.
(···) 그러니 담아, 이제부터 이야길 좀 하자꾸나.
아니 이 땅에 사는 젊은이들, 나와 이마를 맞댈 친구들은 없는가. 이야기꾼은 원래가 입과
가슴뿐이니 불붙는 심장만 있으면 누구든 좀 오려무나. 와서 쩨쩨한 이야긴 아예 때려치우고
인간의 해방, 민족의 통일, 세계의 진보를 이야기하며 이 칠흑 같은 밤을 함께 깨뜨리자꾸나. 



1979년에 나온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의 책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백기완 씨는 그런 이야기꾼이었다. '쩨쩨하지 않은' 그의 '인간의 해방, 민족의 통일, 세계의 진보'의
이야기는 칠흑처럼 어두운 시절을 견디는 위로과  용기가 되었다. 

그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폭력과 맞선 춘향이의 싸움을 출세한 이몽룡이 해소하여 다시 체제
안으로 흡수해 버린 춘향전의 결말에 분개했다. 이몽룡은 출세한 관리로서가 아니라 사랑을
빼앗긴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과 함께 춘향을 해방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지극한 효성의
심청전에서는 지배 계층의 맹종적인 수탈 논리인 공양미 삼백석의 허구를 읽어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프랑스 식민지의 아랍인을 죽인 『이방인』의  주인공은  부조리와
저항의 아이콘이 아니라  허깨비 같은 개인적  자의식에 매몰된 존재라고 질타했다. 그것은
1940년 대 저항정신의  세계적 보편성과 연결되지 않는 고립된 실존주의의 한계라고 했다.
생명을 건 싸움을 위해 대륙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둥지를 부수는 장산곶매의 결연한
자기 다짐과 웅혼한 기상도 특유의 걸걸한 그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평생에 걸쳐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며 살았다.
단호하고 치열했다. 그가 영면에 들었다고 한다.
명복을 빈다.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노동자 김진숙의 복직을 위해
청와대 앞에서 47일의 단식을 하면서도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던
선생님은 제 곁에 내내 계셨죠

전사는 집이 없는 거라고
돌아갈 곳을 부수고 싸워야 한다고
전사의 집은 불의에 맞서는 거리며
광장이며 일터이며 감옥이며 법정이어야 한다고 하셨죠
선생님께 드리는 시는
동지에게 드리는 시는
이런 투쟁의 거리에서 쓰여져야 제맛이겠죠

깨트리지 않으면 깨져야 하는 게
무산자들의 철학이라고 하셨죠
철이 들었다는 속배들이여
썩은 구정물이 너희들의 안방까지 들이닥치고 있구나 하셨죠
내 배지만 부르고 내 등만 따스하려 하면
몸뚱이의 키도, 마음의 키도 안 큰다 하셨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하느니
딱 한 발 떼기에 일생을 걸어라 하셨죠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야 한다 하셨죠
저항은 어떤 잘난 이들이 대행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린 풀들이 숲을 이뤄 서로를 일으켜 세우고
세찬 바람에 맞서 한걸음씩 나아가는 거라 하셨죠

그런 선생님과 함께한
모든 고공의 날들이 단식의 날들이
삭발 농성 원정 점거 오체투지의 날들이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관료적 질서와 권위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 보이지 않는 투신으로
내일 무엇을 얻을 거라는 계산도 없이
오직 지금 여기의 사회적 진실과 신음에 연대해
몸부림치며 절규하던 날들
채증해! 고착해! 포위해! 연행해! 구속해!
십차 이십차 해산명령에도 물러서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노구의 당신과 함께 나아가던
지난 세월들이 눈물겹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어제의 높은 어른이 아니라
함께 어깨 걸고 걸어가는 지금의 친구여서 고마웠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지나온 영웅이 아닌 오늘의 동지여서 고마웠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말과 훈계와 교훈이 아닌
온몸의 연대와 실천이어서 고마웠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타협이 아닌 올곧음이어서 고마웠습니다

당신이 가고 난 지금
나는, 우리는 누구에 기대
이 부정하고 얍삽한 세상을 건너갈까
어디에서 장산곶매의 기상을
함께 일하고 함께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길이 막히면 뚫고 길이 없으면
새길을 내서라도 주어진 판을 깨고
노동자민중의 새판을 열어야 한다는 새뚝이의 이야기를
제국주의와 자본에 맞서 이름없이 쓰러져갔던
옛 전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나도 선생처럼 영영 권력과 부유함과 나태와 타협하지 않고
끝내 밑바닥 민중들과 연대하며
거리와 광장에서 싸우다 쓰러질 수 있을까
두렵고 외로워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마저
전사들의 유산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 끝없는 분노와 서러움마저
전사들의 긴요한 양식이라면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새로운 인간해방의 밑거름이 되어
모든 생명들의 소외와 고통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우리가 저 낮은 거리와 광장에서 맺은 우정은
사랑은 결의는
끝내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마웠습니다. 백발의 동지!


-송경동, 「백발의 전사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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