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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by 장돌뱅이. 2021. 1. 19.

도토리묵은 당연히 도토리로 만든다. 하지만 학술적으로 도토리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종은 없다.
참나무과 중에서 참나무속, 즉 상수리 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등을
통틀어 사람들은 도토리나무라고 한다.

도토리와 상수리는 모양만 약간 다를 뿐 결국 도토리지만 구별해서 부르기도 한다.
어릴 적엔 원기둥처럼 길쭉한 것을 도토리,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을 상수리라고 불렀다.
어른들이 쓰는 성냥개비를 반으로 부러뜨려 도토리나 상수리 뒤에 박아 팽이를 만들었는데, 방바닥에서 손가락으로 돌리면 도토리는 금세 쓰러지는 반면 상수리는 오래 돌았다.

이정록 시인은 글 쓰는 사람답게 좀 더 재미있게 도토리와 상수리를 구분했다.

"드러누워 배꼽에 얹어놓고 흔들었을 때 굴러 떨어지면 상수리, 잘 박혀 있으면 도토리,
귓구멍에 박아넣어도 쏙 빠지면 상수리, 큰일났다 싶어지면 도토리.
속을 파내고 호루라기로 쓸 수 있는 건 상수리, 되레 손가락 파먹는 것은 도토리.
떡메 맞고 후두둑 떨어지는 건 상수리, 야물어 저 혼자 떨어지는 건 도토리.
줍다가 말벌에 쏘일 수 있는 건 상수리, 땅벌에 쏘이게 되면 도토리.
동네 총각 주머니로 가는 것은 상수리, 고부랑 할망구 앞치마로 가는 것은 도토리.
맷돌에 넣고 갈 때 너무 커서 암쇠에서 매좆이 쑥쑥 빠지는 건 상수리, 금방 가루가 되는 것은 도토리.
떨어질 때 산토끼 다람쥐가 깜짝 놀라면 상수리, 아무도 모르면 도토리.
묵을 쒔을 때 빛이 나고 찰지면 상수리, 거무튀튀하고 틉틉하면 도토리.
잠깐 동안 이만큼 주울 수 있으면 상수리, 찾아다니다가 발목만 삐는 건 도토리.
갓난아들 불알만 하면 상수리, 할아버지 썩은 송곳니만 하면 도토리."

도토리묵은 예부터 흉년이나 전재지변이 발생하면 백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하는 기특한 구황식품이었다. 요즈음 자연식품, 건강식품으로 애용되고 있다. 묵의 재료로는 졸참나무 도토리가 가장 좋다고 한다. 도토리묵을 만드는 첫 작업은 껍데기를 까서 도토리를 말리는 일이다. 잘 마른 도토리는 맷돌이나 절구를 사용하여 가루로 만든 다음 떫은맛을 제거하기 위해 물에 담가놓아야 한다. 4∼5일 정도 지난 후 윗물은 걷어내고 가라앉은 앙금만 사용하여 불에 끓인다. 앙금이 끈적끈적 엉기면 틀에 붓고 식히면 묵이 된다.

아내가 지인으로부터 받은 도토리가루를 물에 풀어 도토리묵을 쒔다.
줍고 말리고 가루로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니 간단한 일이었다. 적당량의 물을 붓고, 타지 않게 잘 저어가며 끓이다가 소금과 참기름을 적당히 첨가하면 되었다.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 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 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인사 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김선우, 「단단한 고요」-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를 손으로 슬쩍 건드리니 탱글탱글 우아하게 흔들렸다.
책과 인터넷을 뒤져 묵과 관련된 조리법을 찾아 보았다.

 오이, 참나물에 양념장을 넣거나 김치와 김 가루를 넣은 묵무침과  멸치 육수에 김치와 김 가루 등으로 고명을 얹은 묵채와 묵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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