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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농사' 아내와 햇마늘을 깠다.딸아이네 것까지 준비하다보니 저녁 무렵 시작한 마늘까기는 새벽까지 이어졌다.윔블던 테니스와 클럽 월드컵 축구 TV중계를 보며들으며 눈과 손은 마늘에 집중했다.새벽 3시 파리생제르맹과 비이에른 뮌헨의 8강전이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1차 작업이 끝났다. 껍질을 벗어 환골탈태한 마늘은 맑고 투명한 빛을 띄었다. 밤톨 같아 보였다."이제 내일 아침에 갈아서 냉동실에 넣으면 돼. 한 번만 고생하고 일 년을 먹는 거지."씻은 마늘을 냉장고에 넣으며 아내는 마치 추수를 끝낸 농부처럼 흐믓한 표정을 지었다.*이전글 : 2015.06.14 - 마늘까기 마늘까기몇 해 전부터 취미(?) 삼아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이 사용한 양념 재료는 마늘일 것이다.초보자인 내가 참고하는 인터넷과 책의 조.. 2025. 7. 6.
화양연화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왕가위 감독이 만든 영화 제목에서 알게 된 말이다.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뜻한다고 한다.아내와 각자의 '화양연화'를 꼽아 보자고 한 적이 있다.연애, 결혼, 딸아이 출산, 딸아이 결혼, 손자저하 탄생 등의 국민의례(?)는 빼고서.후보로 떠올린 대부분은 여행이었다.선암사에서 굴목이재를 넘어 송광사로 가던 봄, 경주 무장사 터의 가을, 인도네시아 발리 바뚜르 산의 일출, 손자와 함께 했던 태국, 미국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캠핑, 몰디브의 물 위 숙소, 남미의 마추픽추 등등 - 그중에서 '최고(The best) '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건 어렵다. 불가능하다.'인생 화양연화' 한 가지를 위해 다른 기억을 배제하는 일은 배신 행위다.최상급의 짜릿한 시간으로만 이어지는 삶은.. 2025. 7. 5.
무궁화 무궁화(無窮花)가 피는 계절이다. 산책길에서 자주 만난다.무궁화가 흔해서가 아니라 나의 산책 코스에 무궁화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예전에는 무궁화가 집의 울타리로 자주 쓰여 울타리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상 주변에 많았다고 하는데 진딧물이 많이 꾀여서인지 요즈음은 쉽게 보기 힘들다.무궁화는 7월에 개화하기 시작하여 대략 9월까지 핀다. 하지만 한 번에 만개하지 않고 가지의 밑에서부터 위로 차례차례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여 항상 꽃이 그대로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무궁화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여졌는지 모르겠다.낱낱의 꽃들은 아침에 피어 저녁에 시들고 다음 날에는 떨어진다.질 때는 동백꽃처럼 꽃부리째 떨어진다.무궁화를 두고 '名花百日又無窮'라고 하거나 '槿花一日之榮(무궁화의 하루살이 영화)'이라고 하는 이유가.. 2025. 7. 4.
씨를 뿌리자 왜 그토록 10시를 고집할까?아내와 난 '저 X'이 숙취로 9시 이전에는 일어나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추측했다.누군가는 아마도 **법사가 10시 이후가 길하다고 알려줬기 때문일 거라고 했다. 아마 두 가지 다 일 것도 같다."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안다."영화 >에서 류승범이 한 말이다.찌질의 바닥을 보이는 그들에게 베푸는 더이상의 관용이나 호의는 부패다.인내도 스트레스도 한계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노동은 자연을 바꾸고 동시에 자연에 귀속하는 행위다.밀레의 에서는 기운차게 뿜어져 나온다.한 달 전 우리가 가꾼 희망도 그와 닮았다.세상이라는 대지의 오염을 거둬내고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가리어진 안개를 걷게 하라,국경이며 탑이며 어용학의 울타리며죽 가래 밀어 바다로 몰아 넣라.하여.. 2025. 7. 3.
AI야 놀자 그림강좌에서 AI 앱으로 그림 그리기를 배웠다. 흥미로웠다.무엇보다 나 같은 컴맹도 쉽게 따라할 만큼 간단했다.앱을 다운로드 받아서 원하는 명령어만 입력하면 됐다.AI는 전체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걸 그려주었지만 디테일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아래는 구글의 "제미나이(Gemini)"와 주고받은 문답이다.1."종로의 골목길, 두 사람과 강아지 한 마리를 그려줘."그림이 나왔는데 개의 방향이 사람들과 정반대여서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2. "종로의 골목길, 두 사람과 강아지 한마리, 35mm 캐논, 따뜻한 색감"조금 다르게 입력하자 개의 방향이 수정된, 그러나 전혀 다른 그림이 나왔다. 3. "약간 로우 앵글로"시선만 낮춰 달라고 했는데 그림까지 달라졌다.4. "이 사진의 강아지를 좀 더 작고 귀.. 2025. 7. 2.
7월 1일 이 길은 책을 닮았어요 몇 발자국 걷다 보면 한 페이지가 지나가요 보리수 열매를 찾으려니 휘리릭 다음 문장들이 펼쳐져요 어떤 풀숲에서는 후두둑 빗소리에 갇혀 있었지요 우두커니 한 글자만 바라볼 때도 있었고 그런 날은 어릴 적 슬픈 생각을 많이 한 날이기도 해요 오늘은 무슨 기념일인 거 같아 두근두근 흘러가는 천변에서 날짜를 헤아렸어요 누추한 날들이 너무 많아서일까요 수치스러운 문장들은 왜 하필 이 길에서 또렷해질까요 독해가 어려웠던 날들, 믿어지지 않았던 행간들, 그러나 끝내 설명하지 않는 부호들······ 울먹이며 읽고 울먹이며 묻기도 했던 그 마음이 있어서인가요? 살수록 물음표가 더 좋아졌지요 날마다 다른 뜻이 있는 거 같아서 이번 생도, 어차피 한 권의 책이려니······ 혼자 밑줄 그으며 걸어가는.. 2025. 7. 1.
서울대병원과 근처 병원에 가면 우선 느끼는 것.사람들이 많다!접수를 하는 곳에서도 검사를 하는 데서도 진료를 받기 위해서도 병원비를 내는데서도 기다려야 한다.기다리는 시간을 관통하는 주된 감정은 불안감이다.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일주일쯤 뒤 진료를 받기까지 아내가 그랬을 것이다. 확인 검사 차원이라 큰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문득문득 떠오르는 불안한 상상을 애써 지우며 지내야 했다.불안은 의사 앞에 앉으면 최고조에 달한다. 이럴 때 의사는 신과 동격이다.의사 앞 컴퓨터 화면 속에는 아내의 몸 상태를 나타내는 사진과 수치들이 떠있을 것이다.나는 아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의사의 입을 바라보았다."검사 결과 깨끗합니다."신의 은총에 우리는 합창으로 대답했다."감사합니다!"병원 덕분에 대학로.. 2025. 6. 30.
밍글라바 몇 해전 함께 한국어를 공부했던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을 만났다.작년 겨울, '그 X'이 미친 내란을 저지른 무렵, 만나 창덕궁을 걷고 반년만이다.삼계탕과 함께 친구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감자탕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광화문 광장을 걸었다.비가 예보되어 있었지만 흐리기만 할 뿐 내리진 않았다.습도가 높아서 가벼운 장난을 할 때 몸에 닿는 분수의 물방울이 상쾌했다.광장을 가로질러, 경복궁 앞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갔다. 미얀마 친구들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는 우리나라 역사를 알려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곳 옥상에서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복궁과 세종로 일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친구들은 탄성을 질렀다.백악산의 신비로운 자태와 그 아래 숨은 듯 당당한 경복궁의 조화는 .. 2025. 6. 29.
전쟁기념관 얼마 전 용산에서 결혼식이 있었다.음식을 다 먹고 하객 어른들 틈에 앉아 있는 큰 손자가 지루할 것 같아 데리고 나와 식장 맞은편에 있는 전쟁기념관으로 갔다. 평소의 나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곳이지만 손자저하를 위해서라면야······.예상대로 야외전시장에 있는 탱크와 장갑차, 비행기와 헬리콥터 등이 어린 손자의 호기심을 끌었다.손자에게 퇴역한 무기와 장비들은 전쟁과는 상관없는 그냥 재미있는 놀이기구였다.어떤 시인이 쇠붙이를 녹여 보습을 만들자고 했는데 녹일 것도 없이 아이들의 놀이에 써도 될 것 같다.어른들의 결혼식이라는 서먹한 자리에서 풀려난 해방감 때문인지 손자는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신나게 춤을 추기도 했다.「백마고지(白馬高地)」백마고지 잔인한 어머니, 그 품속에 말없이 누워하.. 2025. 6.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