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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5

내 별명은 '버어마' 1971년 5월 '제1회 박정희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일명 '박스컵(Park's Cup) 결승전이 열렸다. 상대는 당시 아시아 최강 중의 하나인 버어마였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이었다. 내가 그걸 기억하는 건 그때가 중간고사 시험 중이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축구를 볼 수 없어 시험공부를 핑계로 친구집으로 가서 보았다. 축구광이었던 나는 부모가 집을 비운다는 친구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우리는 공부는 뒷전으로 제쳐두고 흑백텔레비전의 화면 속에 눈을 고정한 채 슛이 빗나갈 때마다 안타까운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고 며칠 뒤 재경기에서도 무승부여서 결국 공동 우승으로 끝났다. 그 뒤로도 몇 번 버어마는 우리와 맞붙었고 자주 우리가 졌다. 얼굴이 검은 탓에 초등학교 내내 나의.. 2023. 12. 3.
용피선 '송진이 타고',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김지하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무더위의 맹폭이 계속된다. 해가 설핏해져도 더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가끔씩 부는 저녁 강바람에는 얼마 전까지 느낄 수 있던 청량감마저 사라져 미적지근한 기운만 가득하다. 한국어 공부시간에 영상으로 만난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여름이 미얀마 보다 더 덥다"고 힘들어했다. 설마 우리나라의 여름이 미얀마 보다 더울 리야 있겠는가. 일년 중 가장 더운 4월 미얀마의 수도 양곤의 기온은 36°C를 오르내리고, 고대 유적지로유명한 버강 BAGAN 은 39°C~40°C 혹은 그 이상으로도 치솟으니 말이다. 그들이 한국의 더위를 더 혹독하게 느끼는 것은 자연적인 날씨가 아니라 생활 환경 때문일 것이다. 비좁고 .. 2021. 7. 26.
나란히 가지 않아도 아침에 따릉이를 빌려 타고 강변을 따라 명동으로 달렸다.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는 미얀마 친구들이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러 온다고 해서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개나리와 벚꽃이 지는가 싶더니 철쭉이며 난데없는 튤립까지 봄꽃의 행진이 화려하다. 사람이 가꾼 것이라 해서 아름다움이 덜 하지 않았다. 날씨까지 화창하니 자전거 타기에 더없이 좋았다. 명동에선 피켓을 든 십여 명이 한 조로 일정 시간마다 교대를 해가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코로나로 거리를 유지하다보니 일인 시위에 가까웠고 시위라기보다는 애절한 호소였고 하소연이었다. 그 대열 속에 전날 밤 12시까지 야간 작업을 한 피곤함도 접어둔 채 두 시간 가까이 전철을 타고 온 미얀마 친구가 보였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가 있.. 2021. 4. 11.
궁궁을을과 치마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들은 몸에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 적힌 부적을 붙이거나 불살라 먹었다고 한다. 부적의 신통력이 관군과 일본군의 총탄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혹은 영생불사의 힘을 달라는 기도였는지도 모르겠다. 3월 7일 자 경향신문에 우리로서는 낯선 미얀마 시위 현장의 한 풍경이 보도됐다.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미얀마 시위대들이 군경의 진입을 막기 위해 여성의 치마(터메인)를 빨랫줄에 걸어둔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여성의 빨랫감 아래로 남성이 지나갈 경우 남성성을 잃는다는 미신이 있다고 한다. 시위 진압대들이 차를 멈추고 지붕 위에 올라가 빨래를 걷어내는 담고 있었다. 그런 걸로 보아 속설이 미얀마 남성들 사이에 실제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얇.. 2021. 3. 10.
툰양씨 다시 만나요 한국어 공부를 인연으로 만났던 미얀마 청년 툰양씨가 귀국을 했다. 수업시간에 본 그는 늘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야무져보이는 인상이었다. 미얀마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한국에서 2년 정도 일을 했다. 귀국할 때 코로나19 때문에 잠깐 소동이 있었다. 결혼 일정에 맞춰 예약해둔 귀국 항공편이 갑자기 취소된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황망한 가운데 부랴부랴 서둘러 다행히 대체 항공편을 잡을 수 있었다. 떠나는 날 미안하게도 그를 배웅해주지 못했다. 코로나로 어린이집이 문을 닫아 집에서 손자친구를 돌봐야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함께 한국어를 가르치는 다른 선생님들이 작은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미얀마에서 그는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그들 부부의 새로운 출발에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산다는 일.. 2020.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