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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내 별명은 '버어마'

by 장돌뱅이. 2023. 12. 3.

1971년 5월 '제1회 박정희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일명 '박스컵(Park's Cup) 결승전이 열렸다.
상대는 당시 아시아 최강 중의 하나인 버어마였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이었다.
내가 그걸 기억하는 건 그때가 중간고사 시험 중이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축구를 볼 수 없어 시험공부를 핑계로 친구집으로 가서 보았다.

축구광이었던 나는 부모가 집을 비운다는 친구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우리는 공부는 뒷전으로 제쳐두고 흑백레비전의 화면 속에 눈을 고정한 채 슛이 빗나갈 때마다 안타까운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고 며칠 뒤 재경기에서도 무승부여서 결국 공동 우승으로 끝났다.

그 뒤로도 몇 번 버어마는 우리와 맞붙었고 자주 우리가 졌다. 얼굴이 검은 탓에 초등학교 내내 나의 별명으로 따라다녔던 '베트콩'이 '버어마'로 바뀐 것이 그즈음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버어마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해외여행을 막연하게나마 생각해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실제로 버어마 아닌, 미얀마에 가본 것은 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흐른 2014년이었다. 업무 출장이었다. 동남아 대부분의 나라를 회사일과 가족여행으로 수십 번 가보았으면서도 미얀마는 가보지 못했다. 군부 통치가 지속되면서 미얀마는 비즈니스가 쉽지 않은 나라로 인식되었다. 더 이상 축구 강국도 아니었다.

은퇴 후 얼마 동안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직장 생활의 3분의 1을 해외에서 주재했고 나머지도 잦은 해외출장으로 보낸 나로서는 외국인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마침 미얀마에서 온 이주민들이어서 정감이 더했다. 성실하고 순박해 보였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한국살이' 기간이 짧지 않아 한국어 실력도 제법이었다. 교재와 교안은 있었지만 "한국어능력시험"을 염두에 둔 학생들이 아니어서 자유로운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들과 만남은 오래된  미얀마 여행의 꿈을 자극했다. 아내와 양곤, 만달레이, 인레 호수, 바간(버강, Bagan)의 여행을 계획하는 중에  코로나가 왔고 미얀마에서는 군부가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 미얀마 여행 계획은 접어야 했다. 그 와중에 가르치던 학생들 중 두 명이 귀국을 했고 내 생활에도 변화가 와서 더 이상 그들과 만남을 지속할 수 없었다. 가끔씩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미얀마로 돌아간 한 학생은 군부가 만든 '잔인한 시간' 속에서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얼마 뒤 그는 다시 한국에 오기 위해 수속을 밟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33세의 젊은 가장으로서 앞날을 기약하기 위해 눈에 밟히는 두 살 난 딸아이의 재롱과 결혼 3년 차인 아내의 사랑과 잠시 떨어져 있기로 한 것이다. 

그와 주말에 만났다. 두부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현장 직원 40명 중 12명이 이주노동자고 나머지는 나이 많은 한국인이라고 했다. 숙소로 방 하나를 다른 2명의 미얀마 동료와 빌려서 월세 20만 원씩을 내며 쓰고 있는데 허름한 탓인지 춥다고 어깨를 움츠렸다. 일 자체가 힘든 것 이외에 다행히 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아 일단 안심이 되었다. 

미얀마에서 받던 월급의 4배 이상이 되니 아내에게 많은 송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듯보였다.게다가 요새는 달러 환율이 높아서 더 좋다고 밝게 웃었다. 휴대폰 속에는 가족들 사진이 가득했다. 양곤에 있는 집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실시간으로 딸아이와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걸 녹화해 놓은 영상도 많이 있었다. 애처로운 감정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번 만났을 땐 뼈다귀감자탕을 먹고 그다음에는 삼계탕을 먹기로 하고 헤어졌다.

속을 든든하게 해줄 음식
해를 가릴 챙 넓은 모자
갈증을 풀어줄 시원한 물
따뜻한 밤을 위한 담요 한 장

세상을 가르쳐줄 선생님
발을 감싸줄 든든한 신발
몸에 잘 맞는 바지와 셔츠
포근한 보금자리와 작은 난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일을 위한 희망
마음을 밝혀줄 등불 하나

- 스티브 터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

*정부는 내년도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노동자를 보내달라'면서 외국인 지원 예산을 줄이는 것에 대해 아시아 8개국은 우리나라 정부에 '우려'하는 공식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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