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올해도 내년에도

by 장돌뱅이. 2023. 12. 1.

손자저하 1호가 요즈음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인 『마법 천자문』. 
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한자를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만화다.
주인공인 손오공이 주문으로 "타올라라! 불 화(火)!"라고 외치면 불이 솟고, "솟아라! 뿔 각(角)"이라고 하면
뿔이 솟아난다. 요즘 한자를 공부하려는 아이들에게 최고로 인기가 있는 책이라 출간 20년 만에 무려 220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하니 대단하다.

저하는 이걸로 놀이를 개발했다. 놀이동산에서 사 온 스타워즈 광선검을 들고 나를 향해 '불 화!'라고 공격을 하면 즉각 '물 수'로 받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1분간 쓰러져 있어야 한다.
 '창 창(槍)' 하면 '막을 방(防)'
'칼 검' 해도 '막을 방'
'비 우' 엔 '날 일'
'호랑이 호', '사자 사'
반드시 공격과 방어의 의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즉각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 천!', '땅 지!'

큰 재미가 없어보이고 규칙도 애매한데 이방저방을 뛰어다니고 숨었다가 기습공격을 하며 땀을 흘린다. 영문을 알 리 없는 2호도 모처럼 형과 일심동체가 되어 덩달아 쫓아다니거나 쓰러진다.

나도 그렇지만 저하의 한자 밑천도 두둑하지 않아 금세 바닥이 드러난다.
이럴 때 저하는 아무 말이다 끌어다 붙이는 기발한 어법으로 상대를 초토화시키곤 한다.
그중 최고는 엄마에 대한 공격이었다. 
"엄할 엄, 마귀 마, 엄마!"

(*지난 글 참조 : 2021.11.17 -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저하가 유치원 시절에 쓴 메모

1호에게 장기를 가르쳐주고 이제까지 둘 때마다 져주었다.
매번 초반에는 손자를 곤경에 몰아넣고 고민하는 모습을 즐기다가 이런저런 실수를 범하면서 끝내는 식이었다. 저하는 반복되는 시나리오를 눈치채지 못하고  늘 기세등등해한다.

이번에는 고민으로 몰아넣었다가 풀어주지 않고 그대로 이겨버렸다. 그리고 저하의 동태를 살폈다.
저하는 뒤로 드러눕더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러면서도 그걸 들키기는 싫었는지 감추려고 애를 썼다. 나는 저하를 꼭 안아주었다. 기운을 차린 저하는 벌떡  일어나 다음 판에서 역경을 돌파하여  승리를 거두고 환하게 웃었다.

보드게임 "코드톡"을 하는 중

저하2호는 처음 만나고 10여 분이 짜릿함의 절정이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혼자서 소파에 빠르게 오르내리다간 의자 앉았다 일어서고······
1호가 그 모습을 보며 "난리가 났네, 난리가"라고 기가 차 할 정도다.

격렬한 환영 세리머니가 끝나면 자랑거리를 꺼낸다.
"할아버지 이거 봐요. 할아버지 이것도 봐요. 할아버지 이거 내가 만들었어요."
대부분 이미 본 것들이라 새로운 게 아니지만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게 예의다.

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 Track : 코로 부는 리코더

올 한 해도 아내와 함께 저하들을 만나고 저하들과 함께 놀고 저하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는 사이에도 틈틈이, 자주,  걸핏하면 그들의 활기 넘치는 웃음을 떠올렸다.
그보다 더 즐겁고 가치 있는 시간이 있을까?
따뜻하고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그들이 거칠 것 없이 크게 웃으며 살게 하는 일.
내년에도 후년에도 우리 어른들이 방기할 수 없는 의무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별명은 '버어마'  (0) 2023.12.03
한명숙 선생님 따라하기  (0) 2023.12.02
'반구저기'와 '취모멱자'  (0) 2023.11.30
송년회 시작  (0) 2023.11.29
가을무  (0) 2023.11.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