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이웃에 사는 선비 15명과 친목 모임 "죽란시사"를 만들고 그 규약 서문으로 선비다운 기품과 낭만이 느껴지는「죽란시사첩 서(竹蘭詩社帖 序」를 남겼다.
살구꽃이 피면 한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차례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나면 서지(西池)에 연꽃놀이 삼아 한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차례 모이고, 겨울 큰 눈이 왔을 때 한차례 모이고, 세밑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차례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마시며 시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한다.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준비하여 한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하되, 혹 아들을 본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승진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꽃이 피고, 참외가 익고, 바람이 불고, 큰 눈이 올 때 모임을 갖는다는 약속이 신선하다.
술과 안주뿐만 아니라 붓과 벼루도 준비한다니 고상한 품격도 느껴진다.
지난해가 그랬듯 올 나의 첫 송년회는 정약용의 모임처럼 '폼이 나지는' 않았다.
날짜는 꽃이나 눈 같은 자연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카톡 투표로 정하고, 누군가가 모일 식당을 예약하여 위치를 역시 카톡으로 공유했다. 음주가 불가피하므로 가급적 지하철 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잡았다. 술과 안주는 특별히 논의하지 않았어도 필수였지만 '붓과 벼루의 낭만' 따윈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일단 폭탄주를 말아 한두 잔을 돌린 후 소주파와 맥주파가 갈렸다.
'너의 빈 잔에 술을 따라라, 너의 술잔을 높이 들어라.'
시끌벅적 잔을 채우고 술기운이 돌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지난해와 다르지 않았다.
일 년 사이 달라진 건강, 늘어가는 약, 임플란트 숫자, 최근에 다녀온 여행과 빈 시간을 채워나가는 고만고만한 일상,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식과 웃음을 유발하는 손주, (혈중 알코올 농도가 더 높아지면서) '한 번만 더 말하면 백번'이 되는 학창 시절의 치기스러운 추억, 같은 일을 두고 저마다 다른 기억 때문에 벌어지는 말다툼, 남의 말 끊지 말라며 남의 말을 끊는 횡설수설, 목청을 높이게 하는 정치, 이어지는 '야! 니가 정치할 거 아니면 정치 이야기 빼라'는 누군가의 정치적인(?) 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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