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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용피선

by 장돌뱅이. 2021. 7. 26.

'송진이 타고',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김지하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무더위의 맹폭이 계속된다. 
해가 설핏해져도 더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가끔씩 부는 저녁 강바람에는 얼마 전까지 느낄 수 있던 청량감마저 사라져 미적지근한 기운만 가득하다.

한국어 공부시간에 영상으로 만난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여름이 미얀마 보다 더 덥다"고 힘들어했다. 설마 우리나라의 여름이 미얀마 보다 더울 리야 있겠는가.
일년 중 가장 더운 4월 미얀마의 수도 양곤의 기온은 36°C를 오르내리고,
고대 유적지로유명한 버강 BAGAN 은 39°C~40°C 혹은 그 이상으로도 치솟으니 말이다.

그들이 한국의 더위를 더 혹독하게 느끼는 것은 자연적인 날씨가 아니라 생활 환경 때문일 것이다.
비좁고 습한 숙소에 동료와 함께 기거하다 보니 체감온도가 더 높아지는 것이다.
선풍기만으로 더위를 식힐 수 없어 하루에 샤워를 두 번씩 하며 버틴다고 한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C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에서 -

미얀마 친구들과는 다른 상황에서 나온 글이지만 더위가 주는 고통을 깊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한 친구는 회사 사무실로 쓰던 컨테이너를 개조하여 숙소로 쓰는데 다행히 에어컨이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어 가히 '힐튼호텔'(?) 급에서 지내고 있다. (이 점 그 회사 사장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러나 이 옥상 컨테이너 숙소는 겨울 추위에 취약하다. 작년 겨울  어느 날 그가 카톡을 보내왔다.
"오늘 우리집에 난리가 났어요."
무슨 큰 사고가 났나 해서 급히 연락을 해보니 '난리'가 아니라 '난로를 놨어요'를 잘못 쓴 것이었다.

일터의 환경도  대부분 열악하여 더위가 가중된다.
위 '난리' 해프닝의 주인공은 사출 공장에서 일한다. 플라스틱 재료를 녹이는 고온(700°C)의 작업장이다. 하루에 물을 다섯 팻트병쯤 마신다며  온몸 곳곳에 난 땀띠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신영복 선생님처럼 여름보다 차라리 추운 겨울이 낫다고 했다. 

중국 당나라 때 부자 왕원보(王元寶)의 집에는 용피선(龍皮扇)이라는 가죽부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부채는 사람 앞에 두면 저절로 시원한 바람을 내는데 한참을 두면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당나라로 유학 온 신라 스님들이 가져온 것으로 신라의 동해 바다에서 나는 특수어피로 만든
부채라고 했다.

그 전설 속 부채를 현실 속에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
강의 자료에 가급적 시원한 배경 화면을 넣어주는 대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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