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왜 수박이 이래?"
아내의 말에 바라보니 반으로 잘라진 수박 단면이 노란색이었다.
수박 속이 노랗다니! 처음 보는 일이었다.
"뭐지?......"
아내와 나 그리고 딸, 셋은 잠시 고민을 하다 일단 먹는 걸 보류하기로 했다.
구매처도 확실하여 별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혹시나 우리가 모르는
노란색 성분이 어린 딸아이에게 배탈이라도 일으킬까 염려스러웠다.
"내일 회사에 가서 사람들 한테 물어보고 먹자."
이튿날 내 이야기를 들은 인도네시아 직원은 그걸 왜 안 먹었냐며 낄낄거렸다.
"스망까 꾸닝! 마니스! 띠닥빠빠!(노란 수박이야! 달콤해! 문제없어!)"
지금이야 노란 수박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90년 대 초 인터넷도 없던 시절,
이제 막 해외생활을 시작한 우리 가족에게 노란 수박은 두리안이나 망고스틴,
람부탄 보다 오히려 더 낯선 과일이었다.
며칠 전 마트에 갔다가 속이 노란 수박이 눈에 뜨길래 샀다.
'망고수박'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수박을 가르자 아내도 그때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올림픽 경기가 중반을 넘어섰다.
코로나에, 후쿠시마 원전에, 욱일기 문제에 기대치 최저의 올림픽이지만
막상 시작을 하니 승부의 긴장감에 빠져들게 된다.
아내와 나는 우리나라 외에 인도네시아와 멕시코, 태국과 미얀마 선수를 응원한다.
우리 가족에게 노란 수박처럼 즐거운 기억을 남겨준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 대한 사랑은 그곳에서 보낸 추억의 다양함과 깊음에 비례한다.
그리고 추억은 먹고, 놀고, 일하는 시간과 사람들과 지지고 볶는 관계 속에서 자란다.
인도네시아는 우리 가족이 첫번 째로 방문한 외국이자 처음으로 해외생활을 한 곳이다.
'첫'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모든 경험이 그렇듯이 인도네시아에서 지낸 생활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기대와 실망, 좌충우돌의 실수가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래도 잘 지냈다는 어떤 성취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 시절 가족 모두가 함께 한 테니스와 수영, 여행과 낯선 음식 - 나시고렝, 사떼, 박소, 깡꿍 등등-의 기억은
그 이후 모든 여행과 생활의 선험적 기준이 되어 주었다.
옆집에 사는 딸아이 또래의 자매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중국계 인도네시아 인 자매와 딸아이는 소통을 위한 공통의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해 문제였지만,
양쪽 집 어른들의 우려와 달리 첫 대면의 어색함과 조심스러움이 사라지고 나자
아이들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 큰 웃음소리를 내며 쉽게 어울렸다.
"진짜 재미있었어!"
만족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얼굴로 이웃집 친구와 헤어질 때 딸아이가 한 말이다.
어떤 방법으로 상대방의 의향을 이해하고 자신이 뜻한 바를 이해시켰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아이들은 소통을 위해 말이 아닌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도네시아는 배드민턴 강국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다.
비교적 최근에 7년 정도 미국과 멕시코에서 생활을 했다.
정확히는 미국에 주재를 하면서 거의 매일 국경을 넘어 멕시코에 있는 공장을 다녀왔다.
아내는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 어덜트 스쿨에서 멕시칸들과 어울린 경험을 갖고 있다.
멕시코의 기억은 축구와 따꼬(TACO)로 요약된다.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가끔씩 보도하지만 멕시칸들의 축구 사랑은 상상 이상으로 열광적이다.
미국에서 단순한 친선경기만 벌어져도 국경 검문소는 몰려드는 응원단으로 북적거린다.
멕시코 자국의 프로축구 리그나 북중미 축구대회(골드컵)는 말할 것도 없다. 월드컵에서 멕시코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예 생산라인을 정지시키고 식당에 전체가 모여 응원을 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 날이면 으레 캐이터링 업체에게 의뢰하여 따꼬 파티를 벌였다.
따꼬는 옥수수 전병인 또르띠야에 고기와 해산물 등 여러가지 재료를 싸먹는 음식이다.
가끔씩 직원들이 추천하는 따꼬 식당을 함께 찾아보기도 했다.
물론 다른 음식, 따말레스나 브리또, 파히타스 등도 좋았다.
"만약에 멕시코가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면 회사가 뭘 해줄까?"
축구를 잘해서 '마라도나'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직원에게 농담 삼아 물어보았다.
"내가 일주일 동안 회사를 안 나와도 이해해 달라."
일주일 동안 뭘 하려고 그러느냐 했더니 그냥 거리를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고 데낄라를 마시겠단다.
(이전 글 참조 : 2012.11.30 - XOLOS 파이팅!)
이번 올림픽 축구 8강 전에서 우리나라와 멕시코가 일전을 겨루었다.
그곳 시간으로 새벽이었겠지만 아마 밤잠을 안 자고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거리로 뛰쳐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결승 진출은 실패했지만 3-4위 전에서 일본을 이기고 동메달 따기를 기원해 본다.
태국은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여행을 한 나라다.
치앙마이, 방콕, 파타야, 후아힌, 꼬사무이, 푸껫, 끄라비 등등 - 특히 방콕은 이십여 회를 방문했다.
뿌팟뽕커리나 어쑤언, 팟팍붕파이댕, 솜땀, 얌운센 등 맛깔스러운 음식은 우리로 하여금 태국을
더욱 좋아하게 만든다.
손주가 태어나면 방콕이나 푸껫의 호텔 풀장에서 함께 노는 것이 아내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나도 그랬다. 우리는 첫째 손자가 돌이 채 되기 전에 서둘러 그 소원을 이루었다.
태국은 이번에 놀랍게도 태권도에서 금메달을 땄다.
태국인 친구가 외쳤을 것이다.
"콥쿤마캅(카)!"(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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