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38.0

by 장돌뱅이. 2025. 3. 19.

우리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다.
아주 작은 상처라도 그곳에 온 신경이 쓰인다.


가족의 중심은 아픈 사람이다. 손자저하 2호가 감기에 걸렸다.
나머지 식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연스레 2호에게로 모아진다.
일상이 단순해진다.
유치원에 보낼 수도 없다.

다행히 독감은 아니라지만 열이 높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잔기침도 한다.
그런 증세의 중심은 열이다.
38.0 도. 해열제 투입의 기준 체온이다.
그 이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된다.
어쩔 수 없이 약을 먹이게 되더라도 투입 시간의 간격을 늘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모든 수단이라고 했지만 사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미지근한 물로 몸과 목, 머리 등을 닦아주는 일 뿐이다. 물론 저하가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정작 '모든 수단'은 거기에서부터 필요하다.
우선 부단한 칭찬으로 씩씩함을 부추기거나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을 해야 한다.
그걸로 먹히지 않으면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과장하기도 한다.

가끔씩 저하는 "내가 한번  참아 볼게요." 하며 뜻밖의 의젓함으로 물을 적신 수건에 몸을 맡길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몸을 비틀며 거부를 한다. 체온계와 물수건을 번갈아 사용하며 애를 끓여야 한다.

38.0 이상의 상태가 30분 정도 지속이 되면 해열제를 먹인다는 원칙을 만들어두었지만 어떨 땐 체온이 급격하게 치솟기도 하고, 약을 먹고 30분 정도 후에야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적절한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추가 약의 도움 없이 24시간 정도 정상체온이 유지되어야 한고비를 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프면서 큰다고 쉽게 말할 일이 아니다.

손자저하들의 열에 우리 가족은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손자저하 1호가 어렸을 적 고열로 황급히 응급실을 간 경우가 3번이나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한번은 해외여행 중이어서 더 아찔했다. 

1호 저하에 비해 2호는 그나마 약발이 잘 듣는 편이다. 
38.0이라는 수치만큼이나 아이의 상태도 중요한데 두 저하들은 체온이 올라도 잘 놀고 잘 먹는다.
다행한 일이지만 어느 임계치를 넘어서면 갑자기 컨디션이 처질 수도 있어서 안심할 수 없다.

"세상의 중심은 아픈 사람이고 약한 사람이야."
1호저하의 하굣길에 동생의 상태를 전하며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1호는 요즈음 나와 말이나 문자로 장난을 자주 한다.
"그럼 만약에 내가 아프면 식구 중에 제일 약한 2호와 사이에 누가 더 중심이 되는 거에요?"
"이런? 너 또 나를 놀리려고 하는 질문이잖아?"
"저런? 그런 셈이지요 ㅋㅋㅋ."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두연두한' 초봄  (0) 2025.03.21
생명  (0) 2025.03.20
끝나야 할 것들  (0) 2025.03.18
개나리  (0) 2025.03.17
제15차 범시민대행진  (0) 2025.03.16

댓글